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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통한 변화’ 동서독 주민 마음 녹여
문화·청소년 교류 및 전문가 협력 확대
종교대회, 평화 지향… 분야별 토론의 장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독일은 분단 시절에도 각종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해왔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만큼 교류의 속내는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류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동서독 주민의 생각과 마음을 녹였다.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독일의 통일을 ‘아래로부터의 통일’ ‘평화통일’로 일컫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중에도 계속됐던 동서독의 여러 교류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동독 지역 주민은 지하철을 통해 서독에 드나들 수 있었다. 지하철을 통해 방문한 수가 한 달에 수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는 게 독일 전문가들의 말이다. 또 동독과 서독에서 번갈아가며 열린 종교대회는 많은 사람이 ‘종교대회가 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게 한 자리였다. 수일에 걸쳐 열린 이 종교대회는 종교뿐 아니라 환경 사회 교육 철학 등을 토론할 수 있는 장이었다. 각 분야에 대한 정보 공유와 함께 필요한 지원도 자연스레 오갔다. 그 외 연극과 오케스트라 방문 연주 등 문화교류, 청소년교류 등이 간헐적으로나마 이루어져 왔다.

동서독의 교류는 베를린 장벽으로 거의 단절됐다가 1970~1980년대 다시금 활발해졌다. 여러 영향이 있었겠지만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김용재 전 통일교육원 교수부장은 연구보고서를 통해 “1969년 10월에 집권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가 ‘접촉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전략’에 따라 동서독 교류의 범위를 넓히고 화해 협력을 추진했던 점이 독일 통일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또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1981년 호네커-슈미트 정상회담 등의 영향으로 지자체, 교회, 복지단체 등 민간에서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또 언론과 문화, 체육인의 교류는 물론 보건 환경 과학 기술 등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의 협력이 이뤄졌다.

도시 간 자매결연엔 1989년까지 62개 도시가 참여했다. 청소년 교류는 분단 고착화를 방지하는 데 있어 큰 의미를 가졌다는 평가다. 매년 8만명이 상대방 지역을 여행했다. 재개된 종교대회도 민족통일이라는 다소 작은 범위가 아닌 평화문제를 주제로 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통일부 독일통일연구자료에 따르면 평화운동 집회형식의 종교대회는 국제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진행되면서 동서독 간의 안보정책적인 경직성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냉전시대에도 교류와 협력을 꾸준히 한 독일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민간 차원의 교류와 각 분야의 전문가 협력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어도 이러한 교류는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는 것.

김 전 통일교육원 교수부장은 “통일 이전에 이뤄진 교류와 협력이 독일 통일의 밑바탕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통일 이전에 이러한 교류를 통해 상대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여행하고 정보자료를 교환할 수 있었다”며 “우리도 정치와 민간교류를 따로 분리해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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