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중의 선체 내부 가룡목과 원통목 (사진제공: 문화재청)
조선시대 기관 ‘광흥창’ ‘내섬’ 등 적힌 유물 나와
고려시대 선박 기술과 달리 견고하고 세련미 보여
분청사기 대접·접시·자기·목간 등 총 300여점 출수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기관 ‘광흥창’이 적힌 목간, 조선시대 궁궐에 바치는 물품을 관리하던 ‘내섬시’의 ‘내섬’이 적힌 분청사기가 충남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나왔다. 이들 모두 ‘마도 4호선’이라 명명된 난파선에서 출토됐다. 따라서 이들 출토 유물만 보더라도 ‘마도 4호선’은 조선시대에 물품을 조달하던 조운선이 확실하다.

마도 4호선은 마도 북동쪽 해역 수심 9~15m에 파묻혀 선수가 남동쪽을 향해 있고, 우현 쪽으로 50° 기울어져 있다. 잔존 규모는 길이 13m, 폭 5m, 선심 약 2m이고, 밑판 3열, 좌현 외판 4단, 우현 외판 11단, 선수·선미재도 일부 남아 있는 평저선(平底船)이다.

특히 조선시대 선박 구조를 그려놓은 ‘각선도본(各船圖本)’에서 보여주는 조운선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선수 판재가 조운선은 가로로, 군선은 세로로 그려져 있다.

과거 확인된 고려시대 선박은 선수 판재가 세로로 설치됐지만, 마도 4호선의 경우 선수 판재가 가로로 설치됐다. 또한 좌우 외판재를 연결하는 가룡목(加龍木)이 약 2m 간격으로 6곳에 설치됐는데, 비교적 얇은 원통목을 사용했던 고려시대 선박들과 달리 마도 4호선에서는 두껍고 강한 횡강력재를 사용해 선체의 견고함을 높이고 더욱 세련된 가공 기술을 보여 한층 진보한 조선시대 선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목간과 곡물 출토 상태 (사진제공: 문화재청)
마도 4호선에서는 총 300여점의 유물이 출수됐다. 선박 내부에서는 목간 60여점이 나왔는데 목간 대부분에는 발신처인 나주와 수신처인 광흥창을 뜻하는 ‘나주광흥창(羅州廣興倉)’이 적혀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전라남도 나주 영산창(榮山倉)에서 거둬들인 세곡 또는 공납품을 관리의 녹봉을 관리하던 조선시대 국가 기관인 광흥창으로 옮기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발굴한 마도 1, 2, 3호선은 대부분 당시 권력자나 개인에게 보낸 화물들을 운송하던 선박으로 조운선 여부가 명확하지 않지만, 마도 4호선은 광흥창이라는 국가기관으로 보내는 공물을 적재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조운선으로 판단된다.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는 140여점이 나왔다. 그중 3점에 ‘내섬(內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궁궐에 물품을 관리하던 내섬시(內贍寺)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분청사기 (사진제공: 문화재청)
분청사기는 10점 혹은 20점 단위로 포갠 후 60점의 분청사기들을 성글게 엮어 만든 망태기에 담아 포장했다. 자기를 기형별로 포갠 후 4개의 나무 막대를 길게 덧대 새끼줄로 묶었던 고려시대 포장 방법과는 다른 방식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와 함께 자기에 집단국화문과 승렴문(繩簾文, 새끼줄문양)이 새겨진 점, 중앙에 문양을 성글게 새긴 제작 기법 등은 15세기 초반 제작 양식으로 확인됐다.

마도 4호선은 1410~1420년대(태종~세종)에 물품을 싣고 항해하다가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도 4호선 발굴조사는 올해 10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지난해 10월, 마도 4호선에서는 18세기 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가 출수됐다. 하지만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발굴연대를 측정한 결과 고고학적 층위와 유물의 제작 시기를 고려했을 때 마도 4호선의 분청사기와 백자와의 연관성이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소는 “마도 4호선이 침몰한 후 파묻히고, 그 위쪽에 백자와 관련된 선박이 침몰 후 백자가 다시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용어 설명
-조운선(漕運船): 국가에 수납(收納)하는 조세미(租稅米)를 지방의 창고에서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선박

-광흥창(廣興倉): 조선시대까지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고려 충렬왕 때 최초 설치돼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관아. 현재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자리한 광흥창역(지하철 6호선) 부근이 당시 광흥창이 있던 자리

-내섬시(內贍寺): 조선시대 궁궐에 바치는 토산물,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안주, 왜인(倭人)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조물 관련 일을 담당하던 관청

▲ 나주광흥창 적힌 목간 (사진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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