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光復)’이라는 단어는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다. 한국인에게 있어선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던 암흑 같은 시기에 민족의 수난과 고통으로 나라를 되찾은 것을 의미한다. 특히 올해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가 이처럼 한글을 사용하고, 한국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많은 애국지사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글로만 배운 우리 세대는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민족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독립운동가가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의 12옥사. 옥사 내부에 3칸의 독방이 배치돼 있으며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암호통신인 ‘타벽통 보법’과 ‘감옥 내 독립만세운동’ 등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2층에 있는 일본군 모형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사진촬영: 김민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8명도 좁은 옥사에 30~40명 밀어 넣고
여름에는 창문 닫고 겨울엔 오히려 열어
“누우려 밀면 ‘가슴뼈 부러진다’며 신음”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한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운 독립군들이 갇혔던 ‘서대문형무소’. 해방 후에는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많은 독립군의 피가 묻어 있는 이 형무소는 현재 후손들의 교육 현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4일 오전 서울시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빨간 담벼락 앞에선 시민들이 저마다 다른 포즈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불과 70여년 전에는 형무소에 갇힌 남편, 아내, 아들, 딸 등 우리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많은 사람이 걸었을 한 맺힌 길이지만 이날은 평화롭기만 했다.

타국의 잦은 침략에 의병들이 외적과 맞서 싸워왔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불이 붙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의병의 정신은 독립군으로 발전하게 됐다. 일본군은 이를 제재하기 위해 형무소를 짓고 독립군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1926년 6월 11일 두 차례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형무소의 크기도 확장됐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으로 지어진 서대문형무소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당시 조선 8도에 있는 형무소의 수용인원이 500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큰 규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형무소 정면 전시관(보안과청사) 전시돼 있다.

▲ 여성 독립운동가가 괴로운 표정으로 옥사 안에 갇혀 있는 모습 이 전시관 지하에 재연돼 있다(왼쪽). 중앙사에서 바라본 옥사 모습. 제10·11·12옥사가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돼 중앙사 단상에서 옥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다. (사진촬영: 김민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전시관 지하에는 애국지사들을 고문했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이 재현돼 있다. 뾰족한 가시가 달린 네모난 상자 고문, 몸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등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제의 잔혹함에 소름이 끼쳤다.

엄마와 함께 형무소를 찾은 김도건(9)군은 “아직 학교에서 배우진 못했지만 직접 와서 보니 일본이 참 나쁜 것 같다”며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돼서 일본을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고 이병희(여, 1918~2012년) 지사는 영상 증언을 통해 “재연한 고문은 고문도 아니다. 비행기고문, 물고문은 수시로 받았다”며 “더 심한 고문은 자손을 끊으려고 하는 고문이다. 남자의 성기에 막대를 꽂았고, 여자의 성기는 막대기로 휘저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그랬다”고 증언했다. 또 그는 “추위와 외로움에 싸워야 했지만 독립운동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나라를 구하지 못하면 자기 목숨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잡힌 독립군들은 옥사로 간다. 옥사는 중앙사와 제10, 11, 12옥사가 연결돼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군은 소수의 인원으로 감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이 같은 구조로 지었다. 실제로 중앙사에 있는 간수 감시대에 서서 바라보니 모든 옥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반에 공개된 12옥사로 갔다. 노영선 해설자는 한 방으로 관람객을 끌어 모았다. 8명이 누워도 좁을 만한 방에 20여명의 관람객이 서니 안 그래도 더운 날씨인데 숨이 턱턱 막혔다. 노 해설자는 “형무소는 늘어나는 독립군을 수용하기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은 방에 30~40명의 독립군을 막무가내로 수용했다”며 “게다가 일본군은 겨울에 창문을 열고, 여름에는 창문을 닫는 방법으로 독립군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 서대문형무소의 변화 과정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운용실태 등을 전시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보안과청사) 입구(왼쪽).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 내부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투영돼 있다. (사진촬영: 김민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백범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 옥중 생활을 이같이 기록했다.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옥사를 나와서 공작사로 향했다. 이들은 고문을 받지 않으면 평소엔 공작사에서 일해야 했다. 일제는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식민지배에 필요한 형무소·군부 대·관공서 등의 관용물품을 조달했다. 이 형무소의 공작사에서는 주로 옷감과 의복이 생산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군수용품이 생산됐다. 독립군들에게 휴식은 없었다. 이들은 3·9·10월 기준으로 아침 6시에 기상해서 7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낮 12시에 30분 동안 점심을 먹고 다시 작업에 돌입하면 오후 5시에 끝냈다. 그리고 2시간 뒤인 저녁 8시에 취침했다.

공작사를 지나면 조그만 언덕 위에 한센병사가 보인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수감자들을 별도로 수용했던 이곳은 유일하게 온돌이 깔려 있다. 독립군들은 몸이 아파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통곡의 삼거리’가 나온다. 일본군은 용수를 씌워 독립군을 이동시키는데 이 거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렸다. 왼쪽으로 가면 격벽장이요, 직진하면 면회, 오른쪽으로 가면 사형장이다. 노 해설사에 따르면 용수를 쓴 독립군의 양 팔을 잡은 일본군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제야 독립군은 죽음을 알아채고 통곡했다.

사형장은 일제가 지은 목조건물로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사형장 외부 측면에서 내부를 보면 사형집행 배석자 의자와 교수형에 사용됐던 줄, 그 밑에 열리고 닫히는 나무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많은 독립군들이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독립군을 사형시킨 후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시신을 시구문을 통해 몰래 반출했다. 현재는 일부만 복구돼있다.

▲ 전시관에 있는 독립운동가의 수형기록표.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일제와 맞서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촬영: 김민아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사형장에서 대각선으로 틀면 수감자의 운동장인 격벽장이 나온다. 이곳도 수감자 상호 간 대화를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부채꼴 구조다. 격벽장에서 직진하면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수감된 여옥사가 나온다. 많이 알려진 유관순뿐 아니라 어윤희·권애라·김향화·임명애 등이 개성·수원·파주 지역에 서 3.1운동을 지도하다가 이곳으로 끌려왔다. 수감자 중 임명애는 임신한 몸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노영선 해설사는 “일본 관광객이 관람 올 때는 더 직설적으로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면 ‘참 나쁜 짓을 했네요’라며 숙연해진다”며 “이미 지난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제대로 사실을 알려 줘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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