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한국의 대표적 문호 미당(未堂) 서정주,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인촌(仁村) 김성수, 판소리계의 대부 동리(桐里) 신재효 등 빼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곳, 전북 고창. 고창의 자랑은 뛰어난 인재뿐 만이 아니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 고창읍성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원형 그대로의 견고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다양한 모양의 고인돌이 밀집돼 있는 곳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고창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지리적으로 전라북도 서남단에 위치해 있는 고창은 동남쪽 노령산맥을 중심으로 전라남도와 경계를 이룬다. 북쪽의 일부는 곰소만을 넘어서 부안군에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있다. 또한 고창은 군 한 가운데 방장산(方丈山)에서 발원한 인천강(仁川江)이 흐르고 있어 비옥한 평야가 형성돼 있다. 이처럼 고창은 산과 강·바다·평야 등 천혜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생명의 고장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창을 답사하며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라는 어느 유행가의 가삿말이 머릿 속에 떠올랐다.

고창을 생각하며 전라도와 경상도에 얽힌 가삿말이 생각난다는 게 다소 엉뚱하게 들린다. ‘고창이 장터와 연관이 있나’라는 의문도 들 수 있다. 다름 아닌 ‘고창엔 있어야 할 건 다 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걸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곳, 전북 고창이다.
 
▲ 고창읍성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 고창읍성 북문 ‘공북루’ ⓒ천지일보(뉴스천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 ‘고창읍성’

답사팀은 서울을 출발해 3시간 반 정도를 달려 고창군 읍내에 자리한 고창읍성을 먼저 찾았다. 고창읍성은 조선 세조 32년(1450) 전라우도 19개 군·현이 참여해 3년만인 단종 원년(1453)에 완공됐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불리는 고창읍성은 총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만 5858㎡에 달한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자연석을 이용해 축조했으며,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성문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이중으로 쌓은 성벽), 6개소의 치성(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벽)을 비롯해 성 밖의 해자(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 등 전략적 요충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다. 고창읍성의 성곽은 다행히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큰 돌의 틈을 메우고 있는 작은 돌들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 축성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틈을 백성들이 작은 돌 하나라도 끌어 모아다가 막아 놓은 것이다. 작은 구멍 하나까지라도 메워져 있는 튼튼한 성곽길을 따라 걸으니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염원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 고창읍성 성곽길. 오랜 고목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성곽길을 따라 북문인 ‘공북루’쪽으로 나오다 보면 답성놀이상이 보인다. 답성놀이는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성밟기 놀이로,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또 제일 좋다고 한다.

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흙을 굳게 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게 함으로써 체중을 늘려 더욱 단단히 흙을 다지고자 했을 것이다. 답성놀이(음력 9월 9일)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며 보존되고 있다.
 
▲ 고창읍성 성곽에 낀 이끼. 무채색의 성곽에 녹색 컬러를 입혔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세계 최대 고인돌 유적지, 고창

고창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있다. 바로 고창군 로고에서도 엿볼 수 있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대표적 무덤양식이며, 한반도에서는 약 3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는 약 3만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돼 있고, 그 중 약 10%인 3000여기가 전북 지역에 밀집돼 있다. 전북 지역에서도 고인돌 60% 이상이 고창지역에 분포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 다양한 양식의 고인돌. 고창 고인돌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00년 12월 강화·화순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5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돼 있으며, 단일구역상으로는 최대 밀집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고창은 고인돌 박물관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질 정도로 크기·형식·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골고루 분포돼 있다.

고인돌의 한반도 유입 경로는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고인돌 문화가 한반도에서 융성했음은 확실하다. 고창 고인돌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해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고인돌 유적지를 답사하기 전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고창읍에 위치한 고인돌 박물관이다. 청동기인들의 생활상과 고인돌 제작과정 등이 모형으로 잘 전시돼 있어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인돌은 제작 방식에 따라 탁자식·기반식·개석식·위석식으로 구분된다. 그 중 개석식 고인돌이 가장 보편적인 무덤형태로 쓰였으며, 청동기유물들 대부분이 개석식에서 출토됐다. 개석식은 지하에 시신을 묻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를 뚜껑 돌로 덮는 형태를 말한다.

고인돌은 형태의 다양성뿐 아니라 그 기능도 여러 가지다. 첫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무덤으로서의 기능이다. 둘째는 제단으로서의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단결력 없이는 제작하기 어려운 거대 고인돌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제작하게 함으로써 부족의 결속력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묘표석으로서의 기능이다. 묘표석은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묘역 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의미가 담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동기인들은 하필 옮기기도 어려운 커다란 돌을 이용해 고인돌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선사인들의 종교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그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돌은 신기하게도 어떠한 환경에도 쉽게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니, 그 곁을 영원히 지켜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어느 경서에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다고 했던가.
 
▲ 탁자식 고인돌 ⓒ천지일보(뉴스천지)

당시 선사인들은 현세(現世)뿐 아니라 죽어서도 영혼의 삶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고인돌이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몇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뚝 서서 그 자릴 지키고 있는 고인돌을 보고 있자니, 우리 조상들의 믿음이 어쩌면 헛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인돌을 촬영하던 도중 답사팀은 갑작스럽게 내린 소나기를 맞았다. 비에 젖은 고인돌을 보고 문득 ‘오랜 세월 모든 풍파를 이렇게 이겨왔구나’ 생각하니, 말 없이 제 주인의 곁을 지킨 돌이 기특해 보였다. 고인돌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빗방울을 차례차례 떨어뜨리며, 답사팀에 화답하는 듯했다.

이어서, 전북 고창,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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