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부푼 꿈을 안고 평양 방문길에 올랐던 이희호 여사 일행이 빈손 들고 돌아왔다. 김정은 위원장은커녕 대남총책 김양건조차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평양의 김정은 정권은 당분간 남쪽을 향해 문을 열고 대화하거나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립각을 높이 세워 10월 10일 노동당 창당 70주년을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빛내고 김정은 정권의 안정적인 정착에 몰두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태도는 이희호 여사의 공항 출연 시부터 푸대접으로 역력하게 드러났다. 김정은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비행기는 순안 국제공항에 내렸는데 거기 나타난 사람은 맹경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김성혜 아태평화위 부실장 등이었다. 최소한 공항에는 이들 차관급이 아니라 김양건 대남비서 정도는 나왔어야 했다. 원동연 제1부부장의 경우 한국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 공개로 대남담당에서 해외동포 담당으로 좌천되어 있어 나오지 못한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김정은은 최근 노병대회를 개최하고 양로원을 새로 건설하는 등 어른 챙기기에 고심하는 모양인데 이희호 여사는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평양 방문길에 나서지 않았는가. 도착 뒤부터 이 여사는 김정은의 치적물들을 돌아보느라 살인적인 스케줄에 돌입했다. 첫 방문지인 평양산원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도 이 여사가 방문한 곳이다. 1980년 7월 개원한 평양산원은 출산과 부인병을 치료하는 북한의 유일한 여성 종합병원이다.

연건평 6만㎡인 13층 건물에 6채의 부속건물, 대형분수가 설치된 ‘동방식 공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산원에는 해산실, 수술실, 애기실, 입원실 등 2000여개의 크고 작은 방과 1500여개의 병상이 마련돼 있다. 진료과목으로는 산과, 부인과, 갓난애기과, 내과, 비뇨기과, 구강과, 구급과, 안과, 이비인후과, 렌트겐과, 물리치료과, 실험검사과, 기능진단과 등이 있다. 평양산원 부설 유선종양연구소는 2000년 정상회담 당시 이 여사가 초음파진단기를 기증한 곳이다.

이 여사가 방문한 아동병원은 2013년 10월 김정은 제1위원장이 완공을 앞두고 현장 시찰한 곳으로, 김 제1위원장이 직접 ‘옥류아동병원’으로 이름을 지어준 곳이다. 옥류아동병원은 연면적 3만 2800여㎡, 6층 규모로, 최신식 의료설비들이 갖춰진 각종 치료실과 처치실, 수술실, 수십 개의 입원실은 물론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교실과 놀이장, 휴식장을 갖추고 있다고 당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이 여사는 방북 이틀째인 6일에는 평양 소재 육아원과 애육원, 양로원을 방문한 뒤 묘향산으로 이동했다. 북한에서 육아원은 유치원 취학 전의 고아를, 애육원은 유치원 나이의 고아를 돌보는 곳이다. 북측은 작년 10월 완공 직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현지시찰한 평양 육아원·애육원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최소한 묘향산에서만은 김정은이 이희호 여사를 만나줄 것으로 예상했다. 대체로 북한의 최고 지도자는 8월 초 평양을 떠나 묘향산에서 하루 이틀 휴식을 취한 후 평안북도 창성특각으로 이동해 거기서 여름휴가를 즐긴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까 가슴 설레던 묘향산의 밤은 매미 소리만 요란한 채 흘러갔고 대표단은 마지막 짐을 싸들고 평양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건 고추 따러 간 사람들을 오이밭으로 끌고 다닌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희호 여사는 지난 5일 김포 공항을 떠나며 70년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다고 절절한 심정을 토로했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분단의 장벽을 넘어 통일의 작은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노구를 이끌고 찾아온 손님에게 냉대를 보냈고 평양의 남대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물론 대표단의 구성에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박지원 의원 등 6.15주체들이 빠지고 인도적 지원 성격의 인사들이 많이 포함된 데 대한 감정은 있을 수 있으나, 그들 모두 북한이 주야장창 외치는 ‘우리민족끼리’가 아닌가 말이다. 정녕 북한은 저들의 입맛에 맞는 선별적 대남인사 초청으로 아직도 통일전선 노선을 주장하면서 무슨 민족 대화합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박근혜 정부도 당분간 이런 북한을 구슬리며 통일로 이끌고 갈 생각은 없어 보일진대, 김정은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제2의 건국인 통일은 한동안 윤곽조차 보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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