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70주년 맞아 ‘남산의 힘’ 특별전 개최

[천지일보=이경숙 기자] 운동 삼아서 또는 연인들끼리, 가족들끼리 나들이 삼아 누구나 한번쯤은 올라봤을 남산. 남산은 행정구역상 서울시 중구와 용산구 경계에 걸쳐 있으며, 2009년에는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바로 남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산은 남동-북서쪽으로 기다란 타원형이며, 산세는 예로부터 말이 안장을 벗어 놓은 모양과 누에머리 모양 같다고 전해진다. 우리네 삶속에 친숙히 자리잡고 있는 남산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와도 함께 해왔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래로 남산은 한민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은 풍수지리와 유교이념에 따라 건설된 수도 한양의 내사산으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복을 구하는 국가의 수호산이었다. 이로 인해 건도 초기 남산은 백성들의 출입이 제한됐고, 벌채를 금지하는 등 철저한 규제 아래 보호돼 왔다.

▲ 김윤겸, 천우각-금오계첩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점차 조선왕조의 기틀이 잡히면서 남산에는 풍류를 즐기려는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남산은 문인들이 정자를 짓고 우정을 나누는 공간으로, 백성들이 씨름과 꽃구경을 하는 놀이장소로, 국가와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고 복을 구하는 민간신앙의 터전으로 우리네 삶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남산의 역할은 이뿐이 아니었다. 도성과 봉수, 각종 군사기관 등이 입지해 한양의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0년 고종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의 의열함을 기리고 군대의 사기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군사시설인 남소영 터에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장충단을 설립한다. 고종이 장충단을 설립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점차 간섭해 오는 일본에 대한 자주적 항일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일제는 고종의 의지를 꺽고 조선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장충단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식민지배 영웅에게 그 자리를 내주는 뼈아픈 현실을 맞게 된다.

한민족에게 신성하고 친근했던 남산은 일제 침략으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남산은 국권상실의 현장이 되고 만다. 일본은 남산을 기점으로 토지를 강탈하고, 일본인 거류지와 식민지배의 핵심 통치기구를 지속적으로 증설한다. 또한 조선신궁(일왕가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일왕을 섬기는 신사)을 남산에 세워 조선인들의 정신과 종교를 탄압했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남산은 좌익 집회가 주로 열리는 이념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 남산제모습찾기, 종합기본계획 (사진제공: 서울역사박물관)
1960년대 이후 거대도시가 된 서울 속의 남산은 국민교육장이 돼 반공을 주창하는 자유센터가 장충동에 들어서고, ‘애국애족’의 동상들이 산 중턱에 무수하게 세워졌다. 또 산 아래에는 국가와 정권 수호의 방패 역할을 했던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 잡았다.

광복70주년을 맞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남산의 힘’이라는 주제로 오는 11월 1일까지 특별전이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시기를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던 남산의 모습과 다시 우리 삶 곁으로 돌아온 오늘의 남산이 있기까지 변화과정을 250여점의 역사 자료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강홍빈 관장은 “남산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겪어온 역사의 의미와 작용을 반추해보려고 한다”며 “장소를 읽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읽는 것이며, 장소를 가꾸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것과 직결 된다”고 전시 목적을 설명했다.

치욕스런 과거는 잊어야 할 것이 아니라 역사로 남겨 미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 또한 이번 전시에 담긴 의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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