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19세기 후반, 조선 조정은 국제사회의 변화에 무지한 채 왕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했다. 외교적 무지와 파벌 다툼에 매몰돼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을 자초했을뿐더러 그마저도 주권국가의 권위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조선을 멸망케 하고 이후 일제 식민지로 편입되는 이 ‘망국의 길’은 결국 ‘천추의 한’으로 지금까지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국내외 주요 갈등의 뿌리도 거기서부터 유래할 것이다. 이미 100년의 역사 동안 켜켜이 쌓인 모순과 갈등, 그 적대의 칼끝은 여전히 우리 스스로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불행하고 한스런 역사의 질곡이 또 있을까 싶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882년 조선은 서구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물론 이 또한 청나라의 외교 전략 영향이 더 컸다. 아무튼, 이 조약의 체결로 1883년 4월 미국의 초대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입국해서 5월 19일 자로 비준서가 교환됐고, 그 후속조치로 조선 조정도 같은 해 6월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던 민영익을 대표로 한 보빙사 일행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당시 민영익의 나이는 불과 23세 였다.

민영익 일행은 일본을 거쳐 한 달 이상을 항해한 끝에 같은 해 9월, 미국에 도착해서 21대 대통령 아서(Chester A. Arthur)를 만났다. 민영익 일행이 미국에 도착해서 느꼈을 경천동지의 충격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행했던 유길준이 <서유견문>에 남긴 글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민영익은 아서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큰 절로 예를 표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두례(叩頭禮)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청나라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방식 그대로 이마를 바닥까지 닿게 했다. 그러나 당시 이것이 조선의 예법이었으며, 서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조선 사절단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32년이 흘렀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집권당 대표단이 미국에서 마치 고두례 하듯 큰절을 하는 외교 행보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이야 누가 탓하겠는가. 그러나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했다. 지나치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보기 민망하다.
그뿐이 아니다. 명색이 ‘외교’를 하면서 대놓고 ‘중국보다 미국’이라며 미국을 ‘유일한 동맹’으로 추켜세웠다. 진심이었다면 굴종이요, 그렇지 않다면 국익보다 정략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고약한 발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향해 “진보좌파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는 말까지 했다. 정당외교를 한다면서 굳이 미국에까지 가서 국내 여론을 색깔론으로 둘로 갈라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정치가 나라를 망치게 하는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참으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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