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평왕의 출두 명령을 무시한 오자서는 체포하러 온 군사들을 물리치고 초나라를 탈출하여 송나라로 망명한다. 그곳에 먼저 도망쳐 온 초나라 태자 건과 합세하게 된다. 송나라에서 우연히 화씨의 난이 일어나자 정나라로 옮겨 갔다. 정나라는 두 사람을 극진히 대접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큰 나라 이웃인 진(晋)나라로 들어갔다. 어느 날 진나라 경공이 태자 건에게 정나라를 칠 계획을 일러 주자 그는 정나라로 들어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태자가 사소한 일로 부하 한 명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자가 태자의 음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음모의 내막을 정나라에 고발했다. 그 결과 정나라 정공은 재상 자산을 시켜 태자 건을 죽였다.
오자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태자 건의 아들 승을 데리고 곧장 남쪽의 오(吳)나라로 향했다. 그들은 가까스로 오나라와 초나라 국경인 소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의 초나라 관리에게 발각되자 오자서와 승은 걸어서 도망을 쳤다. 몇 번이나 붙잡힐 뻔했으나 겨우 양자강 기슭까지 도착했다.
그때 강기슭 가까이에서 한 어부가 배를 젓고 있었다. 어부는 오자서가 쫓겨 오는 것을 알고 곧장 배를 태워 주었다. 드디어 강 건너편에 무사히 내린 오자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어부에게 내밀었다.
“이 칼은 매우 값있는 물건이오. 감사의 표시로 드리니 부디 받아 주시기 바라오.”
그러나 어부는 굳이 사양했다.
“초나라에는 이런 방이 나붙었습니다. 오자서를 잡는 자에게는 포상으로 조 5만 석과 집규(초나라의 최고 작위)의 작위를 준다고 합니다만, 내게 그런 뜻이 있다면 이 칼쯤이야 문제도 안 될 것입니다.”
어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정중히 하고 오나라 국경을 무사히 빠져나온 오자서는 도읍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병에 걸려 고생했는가 하면 걸식마저 한 일이 있었다. 여러 가지 고생을 한 끝에 겨우 오나라 도읍에 이르렀다.
그 무렵 오나라 왕 요는 개방 정책을 쓰기 시작할 때였다. 장군으로는 공자 광이 있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을 통하여 오왕 요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공자 광은 오나라 왕 제번의 아들이었다. 광에게는 큰 불만이 있었다. 그 말은 아버지의 4형제 중에서 막내 아우 계자가 왕 위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자가 굳이 사양했기 때문에 우선 광의 아버지 제번이 왕위에 올랐고 나머지 세 아우에게 순서대로 왕위를 계승시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시 자기 차례가 되어도 막내인 계자는 왕위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당연히 왕위 계승권은 본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제번의 아들인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몰래 인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나라 왕 요는 재위 8년에 초나라 공격을 명령했다.
공자 광이 이끄는 오나라 군은 초나라를 침공하여 먼저 번의 패전을 설욕했다. 그때 오자서는 거소로 옮겨 살고 있던 죽은 태자 건의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와 오나라에서 맞이했다.
이윽고 광은 북으로 군사를 몰아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공격했다. 이듬해 다시 광은 초나라에 쳐들어가서 거소와 종리 두 고을 함락시켰다.
오와 초나라 싸움의 발단을 이러했다.
오나라와 초나라의 국경을 사이에 두고 양국의 아가씨 두 명이 살고 있었는데 두 아가씨는 누에를 치기 위해 뽕나무 잎을 뜯으려 다가 서로 다투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집안끼리의 싸움이 되었고 마을과 마을 사이의 싸움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나라 쪽 마을이 몰살당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그렇게 되자 오왕은 화가 났고, 공자 광이 거소와 종리 두 고을로 쳐들어갔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