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정당이 정당 본연의 길인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과는 동떨어진 길을 걷고 있다. 정당정치의 실패로 보이는 국민불신은 지금까지 우리 정치가 보여준 구태로 인해서다. 그 구태 속에서는 권력에 대한 지나친 독점욕이 한몫하는데, 오늘날 정당을 지켜내는 힘은 대의(代議)민주주의 제도와 정당 자체의 기본규범인 당헌·당규인 것이다. 그럼에도 당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세력들은 당헌에 따르기보다는 구태 또는 육감에 의한 세력정치에 골몰하니 이것이 문제가 된다.

국회법 거부권 정국 속에서 새누리당은 폭풍을 만나 헤매는 상태이고, 당 혁신을 모색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내 문제로 여전히 혼란하다. 지금과 같이 거대양당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근저(根底)에는 정당의 기본인 당헌에 의한 정치질서로 나서지 않고, 예전부터 식객(食客)정치 등에서 보여준 권력에 빌붙는 계파정치로 내 편 네 편을 만들어 암투를 벌이는 속사정에 기인된다고 보인다.

새누리당 대표는 당헌 규정에 의한 권한을 축소 집행 또는 행사하지 않으려 해서 문제가 되고, 새정치연합은 오히려 권한을 더 크게 행사하려고 해서 내홍(內訌)을 겪고 있는 게 지금 사정이다. 제철을 만난 듯 지상파방송의 시사프로그램에서는 논객들이 나와 여러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새누리당이 당장 파산될 듯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대통령의 뜻을 받드느라 친박계 최고위원들이 ‘유 원내대표 사퇴론’을 지폈지만 효과가 없는 판에 선출된 최고위원들이 모두 사퇴하게 될 경우 김무성 체제가 무너진다며 일찍이 예고했다.

정당은 대의민주주의의 그릇이고, 기본규범인 당헌은 견고하다. 당직자의 궐위에 대한 규정이 충분히 마련돼 있고 비상대책 상황에도 대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 당헌에 선출직 최고위원이 사퇴해 궐위된 경우에는 30일 이내에 전국위원회를 열어 최고위원을 선출하도록 돼 있다.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만약 김무성 대표가 사퇴해 궐위된다고 해도 당헌 규정에 의거 임기가 1년 미만 남았으므로 다득표 최고위원 순으로 승계하면 되고, 선출직 최고위원이 사퇴해 궐위된다면 당헌 30조 규정에 따라 원내대표가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등 문제될 게 없는데, 논객들이 나와서 하는 말들은 엄연히 당헌 규정이 있음에도 이를 간과한 채 최고위원들의 사퇴가 결행될 경우 김무성 대표의 체제가 무너진다며 유승민 원내대표가 자진 사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금명간이라 말했다가 그 예상이 틀리자 다시 7월 6일이 사퇴 시한이라 못 박는 등 마치 친박계 의원들의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으니 유승민 원내대표가 생각하는 현재의 심정이나 정치적 입지, 정치관과는 다소 멀어 보인다.

유 원내대표가 과연 물러설 것인지는 그 자신만 알 것이지만 당내에 친박, 비박으로 분류돼 의원들의 사퇴 찬반이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하는 대구의 동료의원들조차 4대 4로 찬반세력이 팽팽한 가운데, 선거구 주민들도 ‘물러가라’ 또는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는 판국이다. 그런 상황이니 유 원내대표가 깊게 고민할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속단하기엔 이르다. 새누리당 당헌상 원내대표의 임기는 1년이고, 아직 임기 가운데 4분의 3이 남은 마당에 당사자가 아닌 아웃사이더들이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기왕에 당헌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덧붙일 게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그 결과에 대해 대통령과 함께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당헌 8조와 배치되게 행동한 유 원내대표와는 정치를 함께할 수 없다는 전언이다. 새누리당 당헌 8조는 청와대 관계자가 밝힌 문구 앞에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당의 정강 정책을 충실히 국정에 반영하고’라는 문구가 붙어있으니, 대통령이 당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도 포함되고 있다. 앞 구절을 싹둑 자르고 뒷내용만 붙여놓으면 말이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산전수전 다 겪은 3선의원이다. 대구·경북의 대표 주자로서 지금까지 반듯하게 정치활동해온 그가 대통령이 물러나라 한대서 법정 임기를 채우지 않고 도중에 불명예스럽게 원내대표직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국민여론을 등에 업고 버티기로 반전(反轉)할 것인지 국민은 궁금하다. 이것은 개인문제를 떠나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바, 기본적으로는 당직자가 법정 임기를 지키는 게 정당의 당헌에 따르는 일이고, 당헌 준수가 바로 정당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인 것이다. 당내 일부 세력들은 명예퇴진 운운하고 있지만 “정치에서 퇴진이 명예로운 게 어디 있느냐”는 여당 중진의 목소리가 현 상황을 더욱 답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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