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고령 중심의 대가야(大伽倻), 독자적 문화 형성②
[글마루] 고령 중심의 대가야(大伽倻), 독자적 문화 형성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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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 지산동고분군 전경. 저 멀리 주산 능선을 따라 고분이 분포한 것을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가야국(大伽倻國)은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가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뇌질주일이 42년경 경북 고령(高靈)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알려졌다. 뇌질주일(또는 내진주지)은 대가야를 세우고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됐다.

▲ 대가야 토기 ⓒ천지일보(뉴스천지)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약 520년 동안의 찬란한 역사를 이어온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을 앞세워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

하지만 대가야는 멸망하기 전까지 정치·문화 영역에서 가야 중의 최전성기를 이끈 나라다. 순장문화, 철기문화, 가야금, 토기 등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고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세기까지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렸던 고령(高靈)은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산이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높을 고(高) 신령할 령(靈). 지명 자체만 봐도 신령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양반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불렸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고령에서는 흉년이 들어도 최소 80말은 나온다’고 기록될 정도로 토양은 비옥했고, 물은 충분했다.

▲ 대가야 고분 축조 모습 모형 ⓒ천지일보(뉴스천지)
특히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이 발굴되면서 묻혀 졌던 가야사가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대가야인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내세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서도 지금의 삶이 그대로 연장된다고 믿었던 대가야인들은 많은 껴묻거리를 시신과 함께 묻었다.

순장(殉葬)도 행했는데, 순장이란 물건을 껴묻는 외에 한 집단의 지배 계층에 속한 인물이 죽었을 때 그 뒤를 따라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하위계층의 사람을 같이 묻는 행위다. 이러한 풍속은 결국 피장자가 죽은 뒤에도 생활이 지속된다는 내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왕, 왕족, 귀족,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대가야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망루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왕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부장품을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곳차곳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 금동관(모조품) ⓒ천지일보(뉴스천지)
대가야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유물이 많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고분이 온전한 채로 눈에 띄어 95% 이상이 도굴됐기에 찬란했던 대가야의 역사가 신라보다 많은 부분 감춰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나마 대가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산동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 토기 등의 껴묻거리는 도굴꾼이 미처 캐내지 못하고 남은 유물의 일부다.

고령읍 주산(해발 321m)을 중심으로 남쪽까지 능선을 타고 분포한 고분은 현재 704기로 확인됐다. 남북을 통틀어 가장 많은 고분이 분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돼 있다.

가야금 ‘소리’로 흩어진 7개 가야 통일 염원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만들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들었는데 위판은 하늘을, 아래판은 땅을 상징하며, 중간에 빈 공간은 사람이 사는 삼라만상을 뜻한다고 한다. 12줄은 1년 즉, 12달을 의미하는데 1600년 전 이미 12달을 뜻하는 12줄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분명 문화를 앞서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금의 머리는 양이두(羊耳頭) 즉, 양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륵과 가실왕은 대가야 551년 국운이 기운 때에 왜 가야금을 만들었을까. 가실왕은 흩어진 7개 가야를 소리로 통일해 보고자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에게 곡을 쓰라 명했다. 즉, 가야금은 소리로 통일을 이루려는 가실왕의 염원이 담긴 악기다.

▲ 양이두(羊耳頭) 형상의 가야금 ⓒ천지일보(뉴스천지)
우륵은 185곡을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12곡의 가사만 남았다. ‘하가라도’ ‘상가라도’ 등 2곡은 불교가사이며, 나머지 10곡은 지역 이름이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이(達已)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師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혁(爾赤欠) ▲상기물(上奇物)이다.

한편 가실왕은 일반적으로 대가야의 왕으로 보고 있는데, 두 가지 설이 있다. 대가야의 왕 중에서도 우륵이 대가야 멸망 직전의 인물임을 들어 대가야 마지막 왕이었다고 보는 설과, 479년에 중국 남제(南齊)에 조공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은 바 있는 하지왕(荷知王)으로 보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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