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한민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만들어진 수형기록카드.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아성(牙城) 방한민(方漢旻) 선생을 201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900년 1월 16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에서 부친 방규석(方圭錫)과 모친 조현정의 차남으로 출생한 방 선생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전 민족이 항거한 3.1운동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근무한 방 선생은 항일기사를 연재하면서 일인을 ‘왜놈’으로 표현하는 등 일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일제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ㆍ단죄해 민족의 가슴 속에 항일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조선일보에서 해직됐고,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항일투쟁활동을 위해 일본행을 결행했다.

선생은 1922년 4월 도쿄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유학생을 모아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新瀉縣)에서 발생한 조선인 노동자 학살에 대한 진상보도와 한인유학생 항의데모를 주도했다. 선생은 이로 인해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돼 일본을 떠나야 했다.

선생은 1922년 12월 귀국했으나 이듬해 1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경에 잠시 머물던 선생은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대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의 대성학교 폐쇄조치 이후 선생은 김정기(金正琪)ㆍ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며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선생은 1923년 8월 개산툰과 용정을 연결하는 ‘천도경편 철도’ 개통기념식에 참석하는 조선총독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 및 은행 등을 폭파해 민중봉기를 도모할 준비를 진행하던 중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선생은 1928년 6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가석방 후 조선일보에서 근무하던 중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 안상훈(安相勳)의 ‘열성자대회 사건’, 즉 조선공산당 서울파 재조직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1929년 6월 또 다시 붙잡혔다.

선생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1937년 10월이 되어서야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방한민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해 관련 자료를 1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 방한민 선생이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교육을 펼쳤던 대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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