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문인협회 김덕권 명예회장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 중의하나가 환경인 것 같습니다. ‘소학(小學)’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게 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과 좋은 환경을 만나면 악인도 선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지요?

‘봉생마중 불부자직 백사재니 불염자오(蓬生麻中 不扶自直 白沙在泥 不染自汚) 근묵자흑 근주자적 거필택린 취필유덕(近墨者黑 近朱者赤 居必擇隣 就必有德). 마 밭에 난 쑥은 세워주지 않아도 곧게 서고/ 하안 모래도 진흙과 만나면 물들이지 않아도 더러워지니/ 먹을 다루는 손은 검어지고 주사를 만지면 빨개지는 법/ 거주를 정할 땐 반드시 이웃을 살펴보고 정하고/ 덕 있는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라.’

그만큼 환경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 있는 미 해군교도소의 두 교도관이 유치장 하나를 분홍색으로 칠했다고 합니다. 방의 색깔이 정신건강에 상관이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지요. 그래서 감방을 푸른색, 핑크색, 노란색… 등 여러 색깔로 칠하고 그 감방의 죄수들의 심리적 특색을 관찰하였습니다.

그 후 7개월 동안 선임준위(先任准尉) 진 베이커와 교도소장 론 밀러는 성나고 흥분한 상태였던 새로 온 수감자들이 분홍색 방에 들어간 후 15분만 지나면 이내 조용해지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교도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새로 온 수감자들은 보통 매우 공격적이었으나 7개월의 실험 기간 그들은 단 한 건의 폭력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전역의 다른 교도소에서도 특별 유치장의 벽을 풍선껌 색으로 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군(郡)의 구치소에서도 난폭한 술주정뱅이들을 분홍색 유치장에 밀어 넣기 시작했지요. 이 색채는 그때부터 ‘주정뱅이 유치장의 분홍색(Drunk Tank Pink)’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산에 올라야 절이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닙니다. 부처는 절에 없습니다. 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있는 것입니다. 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누런 불상에만 허리가 아프도록 절만 하는지요?

천당과 지옥도 마찬 가지입니다.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당은 살아있는 지금 여기가 천당이고 또한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바로 천당이고 지옥이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고, 우리가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천당 가려고 하지 말고 사는 동안 천당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부처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 이치를 깨치면 부처요 미혹(迷惑)하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별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이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유위법(有爲法)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이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유위의 법을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와 같고 또한 아침 이슬 같으며 번갯불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는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면 부처요, 미혹해서 알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릇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 환경부터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저 미국 씨애틀의 교도소처럼 온통 우리 환경을 핑크빛으로 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거처하는 ‘덕산재(德山齋)’부터 청정(淸淨)하게 고쳐놓았습니다. 거실 정면에 진리의 상징인 ‘일원상(一圓相)’을 모시고,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의 영정과 서가모니 부처님의 그림을 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역대 원불교를 이끌어 오신 모든 스승님의 사진을 모셔놓았지요. 또한 제가 좋아하는 연꽃 그림과 기도도구를 갖추어놓고 조석으로 기도삼매(祈禱三昧)에 빠져 삽니다.

또 경전(經典)을 읽고 가능한 모든 시간을 쪼개 이 ‘덕화만발’ 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일구월심(日久月心)이지요.

그 부처님이 되는 여섯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타락 심을 내지 않고 꾸준히 향상해가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성불제중의 서원을 세우고도 작심삼일입니다. 하고 또 하고 될 때 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지성여불(至誠如佛)’이라 하지요.

둘째, 견실한 신심(信心)을 가져 부동할 신근(信根)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풍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풍도 불어오는 것이지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전쟁터에 나선 장수처럼 바위 같은 필승의 신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 도덕 가진 이를 친근 공경하고 숭배 신봉하며 정진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습니다. 불보살과 마음을 합하고 닮아 가노라면 나도 불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불보살을 따라 대 정진(大精進)하는 것이지요!

넷째, 나만 못한 근기(根機)를 나 이상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처를 이룬 다음에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부처를 향하여 적공하면서 중생도 함께 이끄는 것입니다. 이를 ‘자미도(自未度) 선도타(先度他)’라고 합니다.

다섯째, 공부와 사업에 대하여 부족한 생각으로 적공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에 만족이란 없습니다. 배가 부르면 나태해집니다. 배가 고파야 분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적공(積功) 적공 대 적공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모든 수용(受用)에 만족하고 이웃에 보시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보시(布施) 보다 더 큰 공덕은 없습니다. 언제나 대우에 대해 만족하고 내가 가진 것을 부족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대로만 하면 부처를 이루는 데 지장이 없겠지요? 세상의 모든 부처님이 이 여섯 가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근묵자흑입니다. 우리 불보살과 어울려 불보살의 인격을 이루어 극락에 안주해야 하지 않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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