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역에 세워진 ‘철마는 달리고 싶다’ 표지판. 철도중단점은 신탄리역이었으나 백마고지역이 개통되면서 이곳에 표지판이 세워졌다. 2017년엔 백마고지역~남방한계선 구간이 복원될 예정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6.25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 당시 참혹했던 모습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곳곳엔 전쟁의 상처가 뚜렷이 남아있다. 본지는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역사적 현장을 직접 찾아가 봤다.

승일교, 남과 북의 합작다리… 평화통일 상징
노동당사, 암울한 곳에서 통일 공연 장소로
백마고지 전적지, 수많은 사상자 위로의 공간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발견하셨나요, 바로 ‘통일’이라는 두 글자입니다. 백마고지역으로 가시는 길 승객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2일 경원선 DMZ 열차 안.

열차의 최종 목적지인 백마고지역에 가까워지자 이 같은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무원의 말대로 고개를 돌려보니 두 개의 산에 글자 ‘통’과 ‘일’이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서울에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철도중단점인 백마고지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푯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더는 앞으로 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7년엔 백마고지역~남방한계선 구간이 복원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철마의 바람은 조금이나마 이뤄지는 셈이다.

▲ 시대적 배경에 따라 의도치 않게 남북 합작다리가 된 승일교. 자세히 보면 왼쪽과 오른쪽의 교각모양이 다르다. 왼쪽은 북한이, 6.25 전쟁 이후 오른쪽은 우리 정부가 각각 다른 공법으로 다리를 만들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평화의 다리 ‘승일교’

▲ 승일교 다리 위에 나 있는 금. 남한과 북한이 반반씩 공사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시대 상황에 따라 의도치 않게 남북 합작다리가 된 승일교.

한 명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콘크리트 초소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초소 옆엔 탱크와 트럭이 그려진 낡은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옛 흔적들이다.

승일교는 남북합작이라는 아이러니한 공사 과정을 거쳐 완공된 6.25전쟁의 부산물이다. 높이 35m, 길이 120m인 이 다리는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시공됐다. 북한이 절반 정도 공사를 추진한 상태에서 6.25전쟁이 터져 중단됐다가 이후 철원이 남한에 편입되면서 우리 측이 나머지 반쪽을 완성했다. 이 때문에 승일교는 한가운데를 기준으로 좌우 교각 모양이 다르다. 한쪽은 둥근 아치형 모양, 다른 한쪽은 네모 모양이다.

직접 다리 위를 걸어보았다. 다리 중간에 반을 쪼갠 듯한 금이 가 있어 더 실감 났다. 동행한 김미숙 철원군문화관광해설사가 금을 사이에 두고 서서 악수하는 제스처를 주문했다. 김 해설사는 “이것처럼 한반도는 군사 분계선이라는 선이 그어져 있어 가까이 있으면서도 왕래하지 못하고 있다”며 “빨리 허물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현재 승일교는 차량이 다닐 수 없다.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다. 대신 현대식 공법으로 만든 주황색 한탄대교가 바로 옆에서 예전 승일교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 철원 노동당사 뒤편 모습. 폭격으로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벽면 곳곳에 수많은 총탄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총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노동당사’

‘노동당사(등록문화재 제22호)’는 현재 골조만 남아 있어 건물 곳곳에 퍼런 하늘이 그대로 투영됐다.

노동당사는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한 러시아식 3층 건물이다. 북한은 이곳에서 고문, 학살 등을 자행했다. 주변에 철원경찰서, 철원군청, 철원감리교회 등이 있었지만 현재는 이 건물만 남아 있다. 그만큼 노동당사는 견고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건물을 쌓아올린 벽돌도 상당히 두꺼웠다. 방음이 잘 됐을 거라는 해석이다.

비교적 건물의 모양을 잘 보전하고 있는 노동당사 앞면을 지나 뒤편으로 가자 전쟁의 참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건물 속이 훤히 보이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움푹 패인 여드름 자국 같았다.

암울했던 이곳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4년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김 관광해설사는 “기성세대는 ‘더 이상 이곳을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상징하지 않아도 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며 “이후 열린음악회가 열리는 등 평화를 갈구하는 장소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 백마고지를 상징하는 흰말 동상 뒤로 흰 자작나무 숲과 전적비가 보인다. 백마고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능선이 마치 흰말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백마고지 전적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열흘 동안 2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백마고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백마고지 전적지는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먼저 흰 자작나무 언덕을 올라 돌무덤, 위령비와 마주했다.

이곳엔 백마고지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3423개)만큼의 평석이 깔려 있었다. 또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전사자비에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잠시 묵념을 한 뒤 전적비로 향했다. 전적비의 높이는 22.5미터다. 백마고지전투를 치르고 승리한 9사단을 위해 ‘2+2+5=9’로 계산해 만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두 개로 나눠진 전적비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형상이다. 전적비를 올려다보니 9사단의 3개 연대를 의미하는 비마 3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뒤로 가자 동구조물이 박혀있었다. 머리가 없는 여러 사람이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 관광해설사는 “백마고지전투를 하다 돌아가신 이들의 영혼을 상징한다”며 “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멀리서나마 백마고지를 본 뒤 DMZ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풀이 무성한 옛 기차길이 보였다. 기찻길엔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 듯 ‘금강산으로 가던 철길’이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철원엔 금강산으로 가는 전철이 있었다. 금강산에 가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려든 철원역 주변으로 요식업소가 103개나 있었다고 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DMZ 열차에서 만난 승무원 김지선씨는 “철원이 더 이상 아픔으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통일이 빨리 돼 이 열차로 많은 사람을 싣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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