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6월 19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A. R. PURCELL의 묘비다. 부산유엔기념공원 관리처는 전사 날짜에 맞춰 추모의 의미로 전사자 조국의 국기를 꼽고 헌화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부산유엔기념공원, 한국전쟁 유엔 전몰장병 2300명 안장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천지일보=김민아 기자] A. R. PURCELL, THE KING'S REGIMENT, 19TH JUNE 1953 AGE 20.

지난 19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의 한 묘비에 새겨진 전사자의 이름과 소속부대, 전사 일자, 전사 당시 나이다. 영국 킹스 부대의 A. R. PURCELL씨는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인 1953년 6월 19일 20세의 나이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휴전을 한 달 앞둔 시기였다. 묘비 옆으로 그를 추모하는 하얀 국화와 영국 국기가 꼽혔다.

유엔기념공원은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유엔군 전몰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 묘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했다. 같은 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돼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했다. 기념묘지에는 최초 1만 1000여명의 전사자가 안장돼 있었으나 유가족이나 본국 정부의 요청으로 이장돼 현재 2300기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 주묘역의 모습이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유엔군 전몰장병 유해 2000여구가 안장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4만여평의 대지에 조성된 공원은 상징구역과 주묘역, 녹지공간으로 나뉜다. 상징구역엔 참전 21개국과 대한민국의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돼 있다.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주묘역엔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7개국의 묘역이 모여 있다. AGE 17, 20, 23, 25, 33… 줄지어 서 있는 2000여개 묘비에 새겨진 전몰장병들의 나이가 많이 어리다.

주묘역 하단의 영연방 위령탑에는 빨간 조화가 놓였다. 유해조차 찾지 못한 전사자의 가족이 두고 간 것이다. 문화해설사 최구식(71, 남)씨는 “시신을 찾지 못한 분들은 묘비가 없으니까 이름이라도 새겨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라며 “전사자의 가족, 친구들이 이곳에 찾아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곳엔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 전사자 중 유해를 찾지 못한 386명의 부대, 계급, 성명이 나라별로 새겨져 있다.

▲ 유가족이 제공해 받은 안장자 사진이 바둑판 형식으로 전시돼 있다. 모두 앳된 모습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주묘역과 녹지지역 사이의 도은트 수로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다. 박수 소리를 듣고 모여드는 물고기에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이 수로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17세)인 호주 병사(JP DAUNT)의 성을 따 지은 것이다. 묘역과 녹지의 경계에 있는 이 수로는 죽음과 삶의 경계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각각 6살, 3살짜리 아들과 공원에 산책을 나온 정현주(39, 여)씨는 “유치원 다닐 때 유엔기념공원에 온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땐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며 “소중한 내 아이가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이 길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녹지공간 왼편에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유엔군 장병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진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가 있다. 추모명비 입구 벽면엔 “우리의 가슴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라는 이해인 수녀의 헌시가 새겨져 있다. 이 명비에는 참전 각국에서 제공한 4만 895명의 전사자(실종자 포함)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로 새겨져 있다. 추모명비가 둘러싸고 있는 원형수반에는 전쟁과 죽음을 상징하는 손상된 철모가 있고, 맞은편에 평화를 상징하는 꽃을 두어 철모가 평화로운 꽃으로 승화하는 뜻을 표현했다.

미국에서 11년 만에 귀국한 손주들과 함께 추모명비를 돌아보던 오금자(73, 여)씨는 “아이들에게 이분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살게 됐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공원에 데려오게 됐다”며 “아이들이 감사한 마음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씨의 큰 손녀 박지영(17, 여)양은 “전쟁으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니, 너무 불쌍하다. 자신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잃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6월이면 발 디딜 틈 없이 공원이 북적여야 하지만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에 발길이 뚝 끊겼다. 7년째 공원에서 문화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최씨는 “6월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서 평균 400여명의 어린이들이 찾아오는데, 올해는 메르스 때문에 방문예약이 모두 취소됐다”며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기간인데 아이들이 많이 올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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