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한국과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했다. 양국 정상은 지난 22일 서울과 일본에서 각각 열리는 국교정상화 50주년 리셉션에 교차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자”면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먼저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어 아베 신조 총리 또한 “양국은 이제 함께 손잡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고 화답했다.

이 날 두 정상은 국교정상 반세기를 맞으며 그동안의 반목과 질시와 갈등을 끝내고 새로운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관계라는 인식과 함께 협력적이고 발전적으로 나가자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다. 물론 “과거사를 딛고 미래로 나가자”는 박 대통령의 발언과, “미래만 보자”는 아베 총리의 발언에는 위안부 문제와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의 현실적 사안으로 인한 묘한 시각차가 잔존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미래까지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 두 나라 정상은 충분히 공감대가 형성된 듯 보였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 말이 있다. 지나간 일은 그저 지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나간 일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랬을 때 비로소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런 차원에서 50년 전 있었던 한일협정(정확한 명칭은 ‘한일기본조약’)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51년 1차 회담부터 난항을 거듭한 한일회담은 1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극적인 타결을 보게 됐다. 그러나 청구권 문제, 어업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에서 한국 측의 지나친 양보가 당시 큰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다. 50년 전인 1965년 6월 22일 맺은 한일협정, 그 1년 전인 1964년 3월 24일, 학생시위로 한일회담 반대운동까지 겪으면서 또 한국 측의 지나친 양보라는 논란거리를 남기면서까지 맺어야 했던 데는 어떠한 사연이 있었을까. 우리는 냉정하게 고찰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은 부끄럽게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이라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요 가난한 나라였다. 잿더미나 다름없는 현실 앞에서 오로지 살아남아야 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이유다.

지금부터는 5.16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그가 국가 재건을 위해 차관을 목적으로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독일 총리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느냐?”며 박 대통령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이때 박 대통령의 답은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겐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였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내가 경제장관을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는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적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충고는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됐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 5000만 마르크를 한국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이상의 글은 당시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 시 통역을 맡았으며, 훗날 한국산업 발전에 중추적 기여를 하게 된 백영훈 원장이 통역관으로서 옆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낱낱이 기록해 외무부에 기록으로 남긴 내용이며, 여러 언론에 개제됐던 논픽션이라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50여년 전, 반대와 시위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를 개통하고 제철소를 세우고 일본과의 수교를 체결했던 데는 바로 나라를 먼저 생각했고, 나아가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는 서독 총리의 조언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박 대통령의 겸허한 결단력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역사의 미해결이라는 난제를 남겼다는 점도 분명히 있겠으나, 절박했던 그 시절을 간과해서도 결코 안 될 일이다. 잿더미 속에서 국가 재건을 위한 밑천이 없어 서독의 광부로 간호사로 파견해 국가 재건의 종자돈으로 삼아야 했던 그 시절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같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 이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다. 국가의 경영은 감상적으로도 안 되며 감정적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엄연한 현실이며 나라와 국민의 안위와 생명이 달린 문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한일관계는 반드시 새롭게 설정돼야 할 것이다. 정부가 ‘투트랙 전략’이라는 대일관계 노선을 설정한 데 대해 긍정적 평가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 한일 두 나라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나아가 세계화를 선점해 가는 데 있어 협력관계요 동반자 관계가 돼야 하는 시대적 명령 앞에 서 있다는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유대인 앞에 몇 번이고 사죄하는 독일 지도자와 16번이나 싸운 프랑스 지도자를 먼저 찾은 독일 지도자의 지도력은 분명 한일관계에 교훈으로 남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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