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
전투 이후 산 1미터 내려앉아 15년 동안 민둥산
중공군, 꽹과리 치고 고량주 마시고 인해전술 돌진
1개 중대 생존자 30명도 안돼… 보충 후 또 투입
최후 공방전서 고지 사수… 다시는 전쟁 없어야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포탄 수십만 발이 떨어지니까 서울 전체가 정전됐다가 불이 한꺼번에 들어올 때처럼 대낮같이 밝았지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찌르고 찔리는 백병전, 고막을 찢는 포탄 소리, 여기 저기 널브러진 시체들, 그리고 죽어 가는 전우들의 절규 소리…. 1952년 10월 6일 한 젊은 병사의 눈에 비친 백마고지 전투 현장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백마고지에 처음엔 나무가 많았는데, 전투 이후엔 나무 없는 민둥산이 돼버렸지요. 30만발에 달하는 포탄 세례로 산이 1m 내려앉을 정도였으니 15년 동안이나 나무가 자랄 수 없었어요.”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84)은 참혹했던 전투의 기억을 덤덤하게 풀어냈다. 1932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박 회장은 6.25 전쟁 발발 당시 서울 서대문 소재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북한 인민군 치하에 놓인 병원은 인민군 부상병으로 넘쳤다. 그때 박 회장은 병원에 위문을 왔던 김일성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후 미군 폭격을 피해 고향에 잠시 피신했던 그는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제1방위군에 지원했다.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28일에 걸쳐 내려간 뒤 제주도에서 육군 훈련을 받고 1951년 5월 말쯤 전방 9사단 28연대로 배치됐다.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한 것은 1952년 10월의 일이었다. 6일 저녁 중공군 38군 114사단 340연대가 2000여발의 포탄을 백마고지 정상에 쏟아 부으면서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우리 군이 주둔하던 고지를 빼앗기 위해 무시무시한 인해전술을 폈다.

“처음에는 철조망을 걷어 내는 갈고리부대, 그 다음엔 꽹과리와 징을 치는 부대, 그 다음은 고량주를 많이 먹어 술 취한 부대가 마구잡이로 올라오더니 뒤를 이어 수류탄 부대, 소총과 따발총을 쏘는 부대가 물밀 듯이 올라왔지요.”

그때 백마고지 방어를 맡았던 30연대의 병력 손실이 심각했다. 후방 예비연대로 있던 28연대가 전투에 긴급 투입됐다. 박 회장이 부대원으로 편성됐던 박격포 소대는 쉴 틈 없이 박격포를 쏘아 댔다. 그러다 보니 포열이 과열돼 포탄이 멀리 나가지 않았다. 박 회장은 “흙을 담는 마대를 포열에 칭칭 감아서 물을 아무리 갖다 부어도 포열이 식지 않았다”며 긴급했던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밤낮 교대 없이 박격포를 쏘다 보니 잠을 자지 못한 포수가 박격포탄을 포열에 거꾸로 넣다가 폭사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뺏고 뺏기는 공방은 계속됐다. 백마고지 4차 공방전에서 중공군 114사단 340연대가 실패하자 중공군은 112사단 334연대를 투입해 3시간의 혈투 끝에 백마고지를 점령했다. 이에 국군 28연대와 30연대가 합동작전을 펼쳐 30분 만에 백마고지를 되찾았다.

치열했던 전투 과정에서 전우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다. 박 회장의 기억에 따르면 전투 후 생존자가 30명을 넘기는 중대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생존자마저 인원 보충을 한 뒤 전투에 다시 투입됐다. 그렇게 12번을 빼앗기고, 다시 12번을 빼앗았다. 백마고지는 마지막 공방전에서 승리한 아군의 차지가 됐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포성이 멈췄다. 생사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드디어 해방됐다. 박 회장은 수 시간 전까지 적으로 싸웠던 중공군과 손을 흔들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아픔은 지금도 박 회장의 가슴 속에 남았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너무나 많은 사람의 생명이 무참히 짓밟힙니다. 우리나라에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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