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

우왕좌왕(右往左往), 당동벌이(黨同伐異), 상화하택(上火下澤), 밀운불우(密雲不雨), 자기기인(自欺欺人), 호질기의(護疾忌醫), 방기곡경(旁岐曲逕).

한학에 밝은 사람이라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이 종잡지 못함’을 의미하는 ‘우왕좌왕’을 제외하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한 이들 사자성어(四字成語)의 공통점은?

눈썰미 있는 분은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교수신문이 매년 말이면 선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최근 시리즈다. 연말 송년 시즌이면 교수신문의 사자성어는 적지 않은 주목을 받곤 하지만 난 이 연례행사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시중에서 잘 쓰이지 않는 어려운 용어를 선정하는 사례가 많은 데다 그 해 핵심 이슈의 정곡을 찌르기보다는 다소 우회적으로 비유하는 용어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현학적인 사자성어 후보군을 고른 뒤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는 선정과정에서 비롯된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올해의 사자성어인 ‘방기곡경’은 말 그대로 촌철살인 그 자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선정된 의미가 두루뭉술한 사자성어에 비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교수신문 발표에 따르면 8일부터 14일까지 교수신문 필진, 일간지 칼럼니스트, 주요학회장, 전국대학 교수협의회 회장 등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응답자 216명 가운데 43%가 방기곡경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다고 한다. 후보군에는 ‘삼중으로 겹쳐진 강이 서로 옳음을 주장하지만 중도를 얻지 못한다’는 의미의 중강부중(重剛不中)이 19%, ‘서로 논란하고 반박함’을 뜻하는 갑론을박(甲論乙駁)이 12%, ‘가는 세월이 물과 같다’는 서자여사(逝者如斯)가 10%, ‘숯불을 안고 있으면서 서늘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포탄희량(抱炭希凉)이 각 10%씩의 지지를 받았다.

방기곡경은 ‘옆으로 난 샛길과 구불구불한 길’이라는 뜻으로, 일을 바른 길을 좇아서 순탄하게 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이 아닌 그릇되고 억지스럽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율곡 이이가 <동호문답>에서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소인배는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교수신문은 방기곡경이 많은 지지를 받은 데 대해 “정치권과 정부에서 세종시법 수정과 4대강 사업 강행, 미디어법의 처리 등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갈등을 안고 있는 문제를 국민의 동의와 같은 정당한 방법을 거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해온 행태를 적절하게 비유했기 때문”이라면서 “한국의 정치가 올바르고 큰 길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교수신문이 이번에 방기곡경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의 교수집단까지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통치행태에 정면으로 고언하고 나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들어 부쩍 ‘진정성’을 들먹이고 있다. “4대강 사업은 대운하 사업이 아니다” “세종시 건설 사업을 수정하려는 것은 오로지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것이지 정치적 배경이 있는 게 아니다”며 자신의 진정성을 믿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어보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과거 이 대통령이 식언(食言)한 사례가 숱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고 싶어도 바로 이 방기곡경이 주는 교훈 때문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율곡 선생이 갈파했듯이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하는 곡학아세의 참모’들이 아직도 청와대와 권력주변에 설치고 있는 게 현실인 탓이다. 이 대통령이 방기곡경의 길을 포기하고 국민과의 소통에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내년의 사자성어는 탄탄대로(坦坦大路), 광명정대(光明正大)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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