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김영석(1945~  )
인적 없는 외진 산 중턱에
반쯤 허물어진 제각(祭閣)
아무도 모르는 망각 지대에
스러지기 직전의 제 그림자를
간신히 붙들고 있다
구석에는 백치 같은 목련이
하얀 꽃을 달고 서 있다
아, 기억만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 아니구나
망각은 더 맑고 고요한 거울이구나.

[시평]
시골 한적한 산길을 가다보면,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다 허물어진 듯한 제각(祭閣)을 만날 때가 있다. 한때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조상의 산소를 돌보기 위해 지어진 제각. 이제는 그 무덤마저 풀더미 속에 묻혀버리고, 덩그마니 제각만 남아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

그런 제각을 보면, 아무도 모르는 망각의 지대에 혼자 남겨져 간신히 제 그림자나 붙들고 서 있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안간힘을 쓰며 서 있는 그런 사람이 생각난다. 언제쯤엔가 자신도 이런 모습으로 힘들게 살았을 듯한, 그런 모습 떠올린다. 한쪽 구석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백치마냥 목련이 하얀 꽃을 매달고 서 있는. 기억은 늘 우리의 지난 시간을 비추어준다. 기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지난 시절을 비추며 우리를 다시 떠올린다. 그러나 이 망각, 그 망각의 시간 속에도 지난 우리의 처연함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거울과 같은 것들이 있구나. 아니 기억보다도 더 맑고 고요한 거울을 망각의 시간은 지니고 있었구나. 망각의 시간을 홀로 견디는 제각을 바라보며, 문득 망각은 또 다른 처연한 기억이라는 역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