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메르스로 온통 소란스러운 시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효목동(孝睦洞) 시절을 떠올려 본다. 대구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금호강이 흘러가는 주변에 동촌유원지가 자리하고 있어 오래전부터 이름난 곳이다. 필자는 70년대 초 그곳 동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했지만 당시에는 효목동 유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효목동을 거쳐 구청과 도청에서 근무했고, 또 중앙부처로 옮겨와서 오랫동안 공직에서 몸담았지만 과거사를 되돌아봐도 동직원 시절의 에피소드와 20대 젊은 나이로 더 높은 공직의 꿈을 꾸며 고뇌하면서 노력하던 때였으니 소중한 시절이기도 하다.

효목동은 도시 중에서도 조용한 촌 동네 형태였지만 고속도로 진입로로 가는 청기와주유소 뒤편에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평수의 효목아파트가 새로 들어섰고, 또 기자촌이 형성되면서 지역이 발전됐다. 특히 언론인들이 옮겨와 집단 거주했던 기자촌이 관내에 있어 당시 20대 초반 젊은 동직원이었던 필자에게 있어 효목동은 훗날 공직에서 발전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한편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 당시 기자촌은 대구 시내의 매일신문사, 영남일보사 등 언론사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새로이 주택단지를 조성하고선 집단으로 살고 있던 지역이라서 그곳에는 신문기자들이 많았다. 필자가 민원업무를 보면서 알음알음으로 알게 된 기자들도 많았지만 특히 문학 동인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길로 내딛던 필자에게는 문화부 기자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돼 여러 가지 덕을 보았다. 그중 하나가 필자가 주선하고 영남일보 문화부 홍 기자가 지면을 할애해 주어 앞으로 시단을 참신하게 일궈갈 문학도들의 작품을 실은 시화 릴레이 ‘가을길 사념’ 연재다.

당시 필자는 대구 시내에서 동인활동을 하던 20명을 선정해 시 한 편씩을 받아 홍 기자에게 전달했는데, 첫 편은 권택명씨의 시와 함께 컷이 실려 나왔다. 젊은 예비문인들의 신선한 글들이어서 신문에 연재되자마자 반향(反響)이 컸다. 기성시인들도 그런 지면을 할애받기가 쉽지 않던 때에 아직 문단에 데뷔하지 않은 문학도들의 시가 시리즈로 연재되니 기성시인들이 신문사에 압력(?)을 넣었지만 당초 취지대로 진행됐는데, 당시 그 난에 연재된 자 가운데 시인으로 등단된 자들은 권택명, 하종오, 박정남, 이기희, 조동화, 조향순, 필자 등 많다.

그리고 시와 소설을 쓰던 예비문인들이 효목동으로 이사해 와서 살기도 했는데, 필자의 퇴근시간에 맞춰 매일같이 함께 어울려 소주 한잔 마시면서 문학을 논하고, 또 어느 날은 시내로 나가서 지역 원로시인이셨던 박훈산(1919∼1985년) 시인과 조기섭(1930∼2011년) 시인, 도광의 시인 등과도 수시로 어울렸다. 때로는 젊은 혈기로 하종오, 김원우(작고)와 이태수, 장상태씨와 함께 경산 고산에 있는 이재행(1946∼1996년) 시인 집을 찾아가 이 시인이 딸을 주제로 쓴 ‘보경이의 프로펠러는’ 시낭송을 듣는 등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새우고 눈 내린 새벽길을 나서 고개를 터벅터벅 걸어오던 때의 낭만이 아직도 기억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공직에서 발전을 가져오게 된 계기도 있었다. 1974년 여름, 5급갑류(현 8급)로 승진해 기쁜 나머지 영남일보 김상태 사회부장에게 전화로 전했는데, 그 분은 내게 축하를 하면서도 “더 노력해서 구청으로 가고, 상급기관으로 가는 것도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공직에서 더 큰 영역이 있음을 깨닫고 그때부터는 시인되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소양고사 등 능력 향상에 매진해 구청과 도청으로, 또 내무부까지 올라갔으니 김상태 사장(영남일보 사장 역임 후 퇴직)의 가르침이 컸고, 그곳 효목동에서 꾼 내 젊은 시절의 꿈은 실현됐다.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흘렀고, 공직에서 나와 가끔씩 형님이 살고 계신 대구 동촌을 가는 도중 효목동을 지나면서 회한에 젖기도 했는데, 뒤늦게나마 효목동 유래를 살펴보다가 본관이 동래(東來)인 필자와도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효목동 원래 지명은 구역 내에 작은 못이 있어서 소목골 또는 소목곡(昭穆谷)으로 불렸다. 320여년 전 조선 숙종 재위시 동래정씨가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됐고, 이후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동래정씨 11대손인 정종악이 학문에 능할 뿐 아니라 일가친척과 이웃 간에 늘 화목하게 지내자 숙종대왕께서 정종악의 호인 효목(孝睦)을 이곳의 지명으로 하라는 명명(命名)으로 소목골에서 ‘효목동’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뒤늦게야 필자가 알게 된 효목동 유래를 그때 알았더라면 그 인연을 더욱 소중히 여겼을 터인데,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젊은 날 3년간 효목동 시절, 그곳에서 내 젊은 시절 애끓는 문학도로서의 꿈을 키워 끝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됐다. 또 언론인 김상태 사장의 진심어린 충고 한마디가 자극제가 돼 동사무소에서 중앙행정기관으로 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기적을 울리며 금호강 아양철교를 건너가던 경주행 완행열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니 이래저래 필자에게는 효목동 시절이 자못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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