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는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끈 3대 거장 중 하나인 라파엘로 산치오의 성화작품을 매주 금요일 지면에 연재한다.

미술사에 끼친 영향력에 비해 라파엘로의 작품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해 덜 알려진 게 사실. 이에 본지는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라파엘로 성화 80여점을 입수해 독자들에게 라파엘로의 작품세계와 일대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라파엘로 연재다.

2차 세계전쟁 등으로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소실됐거나 현재 소장 위치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작품들이 1세기 혹은 2세기 전 선교용으로 제작한 유리원판 필름에 담긴 덕분에 오늘날 대중 앞에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라파엘로 작품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의 천문학적인 액수로 판매될 정도로 가치는 상당하다. 이번 연재를 통해 이미 공개된 적이 있거나 또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그의 작품들이 공개된다.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화가 라파엘로. 그의 안타까운 생애를 위로하는 동시에 작품세계를 느껴보길 바란다.

르네상스 부흥부터 종교개혁까지
그레고리오 9세, 마녀사냥 부추겨… 칼빈(칼뱅) 개신교 그대로 이어받아

▲ Raphael. Forgery. Portrait of Pope Leo Ⅹ and Cardinal Rossi. ownership unknown. (drawing on wood). 라파엘. 모조품. 레오 10세 교황과 로시 추기경 초상화. 소유권이 알려지지 않음. (나무로 드로잉). 최초 공개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Portrait of Leo Ⅹ Pitti. 피티 궁전의 레오 10세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율리오 2세 초상화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SEGNTURA FRESCOES: GREGORY Ⅸ(9) GIVING DECRETALS. 1509-11. FRESCO. IN THE STANZA DELLA SEGNATURA. VATICAN. 교령을 인가하는 그레고리오 9세. 1509~11년 제작.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라파엘로 작품에 등장하는 3인의 교황을 소개한다.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 세간에 공개된 교황 모습은 3명 정도다. 율리오 2세(1503~1513년), 레오 10세(1513~1521년),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년)가 라파엘로 작품을 통해 등장한다.

라파엘로(1483~1520년)가 생존할 당시 6명의 교황이 바뀌었다. 식스토 4세가 라파엘로가 아기 때인 1484년에 물러난 것을 제외하면 5명의 교황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알려진 바로는 라파엘로는 그중 2명의 교황만을 작품에 담았다. 율리오 2세는 피렌체에 있던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러 들여 작품을 후원한 인물이었으며, 레오 10세 역시 라파엘로를 총애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라파엘로가 이 두 교황의 초상화를 남긴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그레고리오 9세는 자신보다 200년이나 앞선 인물인데 작품을 남긴 점이 특이하다.

먼저 이탈리아 태생인 율리오 2세는 ‘전사 교황’으로 불릴 정도로 직접 전쟁에 참전하고 전투를 지휘하는 등 정치에 적극 참여했으며, 교황의 권위 강화에도 힘썼다. 또 그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로마로 불러 들여 르네상스 예술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율리오 2세는 13세기 교회법으로 교황이 수염을 기를 수 없도록 금지한 이래 고대 전통대로 수염을 길렀던 최초의 교황으로 유명하다. 수염을 기른 이유는 1511년 6월부터 1512년 3월까지 볼로냐를 교황령으로 탈환하려는 전투 중에 사망한 병사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표시로 잠시 길렀고, 그후 다시 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파엘로가 남긴 초상화 탓에 율리오 2세는 수염을 기른 모습이 대표적인 모습이 됐다.

이 작품이 완성된 뒤 몇 달 안 돼 율리오 2세는 생을 마감한다. 작품을 보면 손가락에 보석으로 된 반지를 여러 개를 끼고 있어 교황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율리오 2세를 무서운 전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인간적인 모습의 얼굴로 그렸다. 수염도 한몫하고 있지만, 라파엘로가 자신을 인정해 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이같이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임으로 교황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 역시 라파엘로를 총애했다. 레오 10세는 로마를 더욱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교황 업무는 사촌인 줄리오 추기경(클레멘스 교황 7세)에게 맡긴 채 화려한 궁정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에 집중하게 된다. 이로 인해 레오 10세는 바닥난 교황청 재정을 면죄부를 팔아 채운 탓에 마틴 루터로부터 비난을 샀고, 1521년 루터를 사제직에서 파문시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다. 공교롭게도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시킨 그 해에 죽게 된다.

라파엘로가 남긴 작품에서 레오 10세는 2명의 추기경과 함께 등장하는데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1523년 교황 자리에 오르는 사촌인 줄리오 추기경(클레멘스 7세)이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 9세 작품은 교황의 교령을 인가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고대 전통대로 수염을 기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레고리오 9세는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던 종교재판을 공식화해 확장시킨 인물이며, 그로 인해 이단 정죄와 마녀사냥이 성행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라파엘로가 왜 이 작품을 남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추기경에게 교령을 인가하는 모습은 마녀사냥, 면죄부 사건까지 있게 될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유추해 보게 된다. 종교재판을 공식화하면서 교황청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3명의 교황 초상화를 통해 교황에 의해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우게 되지만, 반면 가톨릭의 부패를 부추겨 종교개혁까지 일어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개신교도 마녀사냥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칼뱅)이다. 장로교를 창시한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개혁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정한 교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고 처형했다. 이런 ‘마녀사냥’으로 4년 동안 무려 58명을 사형하고, 76명이나 추방했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 인구가 1만 6000명 미만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1세기 전 신비함 담긴 ‘컬러 유리원판 필름’
원본에 흡사하도록 붓으로 채색, 샌드위치형 제작


1세기 전 합성수지(플라스틱)로 제작된 흑백필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리원판 필름을 사용했다. 유리원판 필름은 인화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나 선교사업 목적으로 슬라이드 방식으로 제작된 필름은 소수의 특수한 부류만 이용했다. 슬라이드 방식은 영상 교육용으로 사용하던 필름이다.

특히 신비감을 갖게 하는 것이 컬러 유리원판 필름이다. 당시 필름은 감광도가 매우 낮은 건판으로 0.2㎜ 유리판에 감광재료를 바른 후 젤라틴 막을 입혀 촬영하면 실상과 반대인 네거티브(음화)로 찍혀지고 이것을 다시 실상과 같은 포지티브(양화)로 반전시킨 후 그 위에 원색에 가까운 칠을 해 컬러 유리 원판으로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품을 찍어 나온 유리로 된 흑백필름에 붓으로 색을 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유리를 덧씌워 ‘샌드위치형’으로 만든 것이다. 이같이 만들어진 슬라이드 유리원판 필름은 환등기를 통해 영상자료로 사용됐다.

이 컬러 유리원판 필름에는 특히 고흐, 피카소 등의 명화 작품 뿐 아니라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렘브란트 거장들의 성화 작품이 들어가 있다. 현품과 흡사하게 제작돼 있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 환등기와 여러 성화작품이 담긴 유리원판 필름의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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