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동네에서 굿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가 떠나 갈 듯 징소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어느 집에서 굿을 하나 보다 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불행한 일이 생겨도 굿을 하고, 별 탈 없이 살고 있으면서도 더 잘 살게 해 달라며 굿을 했다. 굿을 한 덕에 신통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는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굿판을 벌였다.

굿은 무당이 하는 것인데, 옛날에는 무당이 정치를 하고 나라의 제사를 이끄는 지도자 노릇을 했다. 정치와 제사가 분리되면서 무당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사람을 치료하거나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가 역할 등을 하게 되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 무당은 의사역할을 했고 덕분에 국가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창궐하면 한 고을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위태로워지기 일쑤였다. 백성이 굶주리고 병이 들면 임금이 덕이 없다며 임금에 대한 원망이 들끓었다. 전염병이 돌면 나라에서 즉시 무당을 앞세워 환자를 치료케 하고 병이 퍼지지 않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편에도 “…만약 열병을 앓고 있는 호(戶)가 있게 되면, 수령이 의생과 무격(무당)으로 하여금 살피어 구료하게 하되, 혹시 마음을 써서 구제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즉시 논죄하고, 연말에 가서 사람을 많이 살린 무당은 세를 감하여 주고, 혹은 부역을 견감하여 주기도 하고…”라는 예조의 보고서가 나온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선비들이 무당의 의료 행위가 온당치 못하다고 금지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이 나는 것은 조상의 묘를 잘못 썼거나 귀신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귀신에게 겁을 주어 쫓아내는 것이 축귀(逐鬼)인데, 복숭아나무나 대나무가지로 두들겨 패거나 물이나 팥을 뿌리며 큰 소리를 내며 몸에 붙은 귀신을 몰아내려 했다. 원혼의 한을 풀어 주어 물러나게 하는 것이 신원(伸寃)으로, 무당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조상의 원혼을 불러내면, 참석한 식구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억울한 원혼 때문에 병이 들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여긴 탓에 평소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억울하게 죽는 백성이 없도록 함부로 법을 집행하거나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되기도 했다. 민담에 처녀 귀신이 많이 등장한 것도,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울하게 죽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세종 때 황해도에서 전염병이 돌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그때 제문에는 “…백성들이 불행해 한 지역이 죄다 질병을 만났도다. 점점 서로 전염이 되어 퍼져 나가는 형세를 막을 수 없으니 슬프다… 맑은 술을 드리고 밝게 고하나니, 너희 귀신들도 거의 감응하리… 이 한 잔을 음향한 다음… 한 지방을 편케 하고 이 백성을 오래 살게 하라”고 적혀 있다.

무당을 통해서라도 백성을 위로하려 했던 그 정신만은 새겨야 할 것 같다. 아랍발 전염병으로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