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옛날 사람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을 떠올리는 것은 세상의 불의를 나무라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의한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는 나라의 어른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에서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같은 꼿꼿한 어른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불의와 혼란을 질타할 공정한 역할자도 없다. 김시습은 길을 가다가 사인교에 몸을 비스듬히 젖혀 기대어 안하무인으로 오만하게 행차하는 고관대작의 앞을 가로막고서 큰 소리로 혼내주는 것 정도는 예사였다.

심지어는 짜증이 나도록 오래 벼슬자리에 붙어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최고 벼슬 영의정을 향해서도 “이놈아,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 같이 외곬이고 굽힘이 없는 그를 가까이 하는 것이 위태롭다 여겨 그와 사귀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피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는 수양대군과 한명회(韓明澮)가 공모해 일으킨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황보인과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고 급기야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해 왕위에 오른 불충한 역모(逆謀) 정변에 비판적인 생육신(生六臣)이었다. 그는 비록 세조의 부름에 못 이겨 잠시 불경 번역 사업에 참여한 적은 있었지만 그밖에는 벼슬하라는 집요한 권유를 물리치고 평생 올곧은 선비 승려 야인(野人), 때로는 기인 광인(狂人)으로 전국의 강호(江湖)를 떠돌았다.

지금 세상이 별의별 일로 다 시끄럽고 어지럽다. 정쟁(政爭)으로, 정권 실세들의 뇌물 수수 혐의로, 갑자기 돌기 시작한 역병(疫病)에 대한 부실한 방역작업으로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뿐만 아니라 외교 안보 경제의 각종 현안들과 심지어는 정부의 고관 인사와 개혁 작업 등 뭐 한 가지라도 조용히 순조롭게 돼 나가는 것이 없다. 정쟁은 고질이다. 정부와 국회가 싸우고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다투고 여야끼리는 물론 여당 안이나 야당 안에서 자기들끼리 패가 갈려 싸우기도 한다. 이처럼 세상을 어지럽게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지위와 녹봉(祿俸) 높은 고관대작들의 일탈된 말과 행동, 대의를 저버린 개인과 패거리 이익을 위한 각축(角逐)이 빚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을 나무라고 혼내줄 추상 같은 위엄과 높은 덕망을 갖춘 나라의 어른이 마땅히 없다. 도리어 그들이 큰 소리를 치는 형국이다. 그것이 불현듯 김시습을 떠올리게 된 이유다.

한 번은 그 김시습이 서강(西江)에 있는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韓明澮)의 별장을 지나면서 별장에 걸려있는 시 한 수를 보게 됐다. 이런 시였다. ‘청춘엔 사직을 붙들었고 백발이 되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 김시습은 이 시에서 ‘붙잡을 부(扶)’자를 ‘위태로울 위(危)’자로 ‘누울 와(臥)’를 ‘더러울 오(汚)’로 바꾸어 ‘청춘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늙어선 강호를 더럽히노라’라는 뜻이 되도록 해놓았다. 이 신랄한 조롱에 한명회는 그만 그 시를 치우고 말았다. 그때 한명회가 몹시 부끄럽다 느꼈는지 아니면 김시습을 가만 두고 싶지 않았었는지 혹여 그 둘 다였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만약 김시습이 지금 살아있더라도 그 같이 혼내주지 않고는 그의 올곧은 성정(性情)으로 결단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없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강호’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꿀맛 같은 권력의 중심지였던 옛 영화에 미련을 두고 가끔은 뿌리가 끊기지 않은 세력을 부리면서 부질없는 갈등과 분란의 진원지가 되곤 하는 사람들이 필시 그들일 것이다.

속세와 불문(佛門) 및 선(禪), 도(道)의 경계를 넘나든 김시습은 속세의 일에 조금도 무심하지 않았다. 김시습은 궁궐에서 발표되는 고관 인사 명단을 보다가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고관으로 발탁됐을 때는 “이 나라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사람이 이런 자리를 맡게 되었나” 하고 통탄했었다고 한다. 500년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옛 정사(政事)를 한탄한 김시습의 이 같은 말이 현시대 우리 가슴에 찡한 공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애써 찾으려 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 현 정부의 고관 인사가 그 같이 국민을 너무 많이 실망시켜왔다. 인사청문회 문턱에서 빈축을 사지 않은 고관 후보자가 거의 없다. 아예 청문회 문턱을 밟기도 전에 중도 하차한 사람도 있었다. 청문회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현직에서 뛰어나게 능력을 발휘하고 국민에게 신뢰를 준 사람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사의 혜택이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널리 인재를 발탁했거나 인사에서 소외됐던 의욕이 넘치는 신인들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도 별로 없다. 국민이 받는 대체적인 인상은 지금까지의 인사는 기득권자들을 위한 그들끼리의 잔치였다. 인사가 이렇게 되면 위와 아랫물이 뒤섞이지 않으면 썩듯이 국정과 민생에 새 기풍이 생기거나 새롭고 신선하게 정화(淨化)되지 않으며 기회에서 소외된 국민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지도 않는다. 김시습이 이런 인사를 볼 수만 있다면 뭐라 할런지 상상하는 자체로 재미있어진다.

김시습은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3살 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5살 때 한시를 지었던 신동이며 천재였다. 그는 세종 17년에 나서 성종 24년까지 살았다. 세종이 김시습을 편전으로 불러 문종 임금이 되는 세자와 단종이 되는 세손을 가리키며 ‘저 둘이 장래에 너의 임금이 될지니 잘 기억해 두라’고 장래를 약속해 주었다. 하지만 강력한 후원자가 돼주었을 세종 문종은 세상을 뜨고 단종마저 불행해짐으로써 천재 김시습의 일생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 어른 지금 어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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