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7)

“그는 조국 해방을 위해 곳곳을 누비며 항일을 호소한 조선의 걸출한 지도자다. 그의 희생은 조선 독립운동의 앞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혁명군 벽해(碧海) 양세봉(梁世奉) 총사령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관내에서 발행된 ‘흑백반월간(黑白半月刊)’ 제10기에는 이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중국 남만주 일대에서 치열하게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항일 민족 운동사의 영웅에 대한 찬사였다.

일제 제국주의는 1934년부터 동북에서 이른바 ‘치안 숙정’이란 항일 무장 세력을 대대적으로 포위해 소탕는 대학살 작전을 펼쳤다.

특히 양 총사령관이 활약하던 남만주와 동변도 일대는 일본군 치안 숙정이 중점적으로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1934년 9월 19일 아동양(亞東洋)은 양 총사령관이 주둔하고 있던 환인현 향수하자촌 북전자둔에 찾아왔다. 아동양은 산림대 우두머리로 예전부터 양 총사령관과 왕래가 있던 자였지만 후에 일제에 돈으로 매수돼 변절한 자였다.

회의를 하고 있던 양 장군은 회의장을 잠시 떠나 자신을 찾아온 아동양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양 총사령관을 찾아온 아동양의 목적은 그의 암살이었다. 그 당시 양 총사령관에게 아동양이 제안을 한 것은 삼과유수에 있는 자신의 군대를 접수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양 총사령관은 일제와 대항하기 위해선 항일 투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터라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양 총사령관은 그날 밤 김두칠·장명도·장광배와 함께 20명의 대원을 데리고 아동양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유난히 검은 구름에 달빛도 별빛도 가려져 어둠이 짙게 깔리던 그 순간 앞서 길을 인도하던 아동양이 갑작이 보이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양 총사령관은은 부하들에게 조심하란 명령을 내렸지만 어두컴컴한 앞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일본의 계략에 빠진 양 총사령관은 일제 앞잡이인 아동양에 의해 소황구(小荒溝)에서 저격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가슴에 치명상을 입은 안 장군은 장명도와 김두칠, 정광배에게 “나는 더 살 것 같지 않소. 동지들은 꼭 끝까지 투쟁해야 하오”란 말을 남긴 채 당시 4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양 총사령관과 독립투쟁에 나섰던 동지들은 목을 놓아 대성통곡했고, 그들은 큰 소리로 “아!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별이 그만 떨어졌구나!”라며 크게 흐느꼈다.

양 총사령관은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 통합 운동의 성과로 형성된 국민부의 무장 항일 군사 조직인

▲ 신빈현 양세봉 장군 동상.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중국인 항일 운동 지도자들이 조직한 요녕민중자위군 등과 연합해 영릉가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3)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다.

또한 수십 차례에 걸쳐 지속적인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1930년대 항일 독립 운동에 금자탑을 쌓아올린 명장이었다.

농민 출신인 그는 소박하면서도 뜨거운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또한 자기 휘하에 있는 대원에겐 아버지 같고 형님과 같은 지도자로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며, 전장에서는 늘 앞장서 싸웠고 후퇴할 때는 맨 마지막에 서는 그의 용감하고 과감한 모습에 대원들은 그를 존경했다.

안병호(양세봉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은 “양 총사령관이 이끈 조선혁명군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한국인이 조직한 강력한 무장 군대였다”며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민족의 항일 무장 조직 중에서도 역량이 뛰어났다”고 밝혔다.

그의 시신은 1934년 9월 25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안장됐다가 1961년 유골을 출관해 평양 근교로 안장했다. 또한 남한에서는 서울 국립묘지 현충원에 그의 묘소(가묘)가 만들어졌으며,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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