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이건 비극이다. 평양에서는 일국의 국방장관인 인민무력부장이 처형되는 등 올해 들어서만 최고위 엘리트 15명이 수천발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고 ‘불고기’ 되어 사라져가는 가운데 김씨 왕조의 황태자인 김정철은 런던에 나타나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수령이 된 동생 김정은은 모스크바에도 맘대로 못가는 데 형은 자본주의 발상지 런던에 훨훨 날아가고 있으니 이런 것을 명과 암이라고 해야 할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형 김정철(34)이 이틀 연속 영국 런던에서 일본 TV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지난 20일 밤, 젊은 여성과 함께 로열앨버트홀에 나타났다. 록스타 에릭 클랩튼의 70세 기념 콘서트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회색 양복을 입은 반백의 측근이 다른 수행원들보다 한발 가까이서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다름 아닌 영국 주재 북한 대사 현학봉이었다. 일국의 대사가 수행하는 데서 황태자의 권력을 읽을 수 있었다.

김정철 일행이 머문 숙소는 영국 런던 중심부 템스강 북쪽에 있는 5성급 첼시하버 호텔이었다. 한국에는 단 한 곳밖에 없는 5성급 호텔이다. 이곳은 침대만 비치된 스탠더드 객실이 하나도 없고, 158객실 전부가 침실과 응접실을 갖춘 ‘스위트룸’이다. 비성수기 평일을 기준으로 가장 싼 방도 1박에 228파운드(약 39만원) 한다. 가장 비싼 방은 2023파운드다.

그는 런던 시내에서 대형 고급 승합차를 타고 이동했다. 기다리던 일본 TBS 방송국 취재팀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취재팀을 막았다. 그 사이 김정철은 싸늘한 표정으로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김정철은 과거에도 에릭 클랩튼 콘서트에 여러 번 모습을 나타냈다. 2006년엔 독일에서, 2011년엔 싱가포르에서, 이번엔 런던에서 에릭 클랩튼의 우울하고 서정적인 기타 연주와 읊조리는 듯한 노래를 들었다.

콘서트장 안에서 김정철은 편안한 얼굴이 됐다. 동행한 반백의 수행원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도, 여성도, 수행원도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지 않았다. 김정일 가족 중에 김정철만 서구 문화를 즐기는 건 아니다. 13년 전 그보다 열 살 많은 이복 맏형 김정남(44) 역시 위조 여권을 들고 나리타공항에 나타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 김정남은 문자판에 보석이 박힌 롤렉스시계를 차고 있었다. 트렁크엔 100달러 지폐가 가득했고 지갑엔 달러·엔화 고액권이 3㎝ 두께로 들어 있었다. 돈 많아 보일 뿐 세련되진 않았던 김정남과 달리, 김정철은 당장 서울에 나타나도 구분이 안가는 서구적 패션을 하고 있었다.

콘서트가 끝난 뒤 TBS 카메라가 복도에서 그를 쫓아갔다. 일본 취재팀이 영어로 “콘서트는 어땠냐” “북한에서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동생과 관계가 어떠냐”고 물었다. 경호원이 카메라 렌즈를 손으로 막았다. 김정철은 대답하지 않고 콘서트장을 떠났다. TBS는 그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거쳐 런던에 왔고, 22일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예약해둔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체제 성립 후, 김정철의 동선이 외부에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정은 집권 후 여동생 김여정은 중요 보직에 발탁됐지만 김정철의 행방은 불분명했다. 김정철은 2008년 주영 북한대사관을 통해 에릭 클랩튼 평양 공연을 추진하려다 무산된 적이 있다. 런던에 나타난 그는 4년 전 싱가포르 콘서트 때보다 다소 야윈 인상이었다. 동생이 ‘최고 존엄’으로 올라간 뒤 심신이 결코 편치 않았음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서울에 에릭 클랩튼이 온다면 김정은이 중국 비자를 들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에릭 클랩튼 왕팬이다. 그러나 이제 김정철의 행동반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번 런던 여행이 그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당분간 김정은은 형을 자제시킬 명분을 가지게 됐다. 그것은 김정은이 노리는 ‘형님견제’를 언론이 만들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왜? 바로 김정철은 북한 수령 가장 가까이에 있는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북한에서 수령의 유고가 발생한다면 후계자는 김여정과 김정철이다. 장자계승론 대로라면 당연히 김정철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 불운의 장자가 ‘내일’을 꿈꾸는 평양의 밤은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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