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白紙)
박제천(1945~ )
허전한 마음 한 귀퉁이를 문진(文鎭)으로 눌러놓고 여기저기 유인(遊印)이나 찍어보다가 꾸겨버리곤 합니다 처음부터 쓰고 싶었던 글월도 없었으니 먹(墨)을 더럽히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꾸겨버린 종이뭉치 사이로 언뜻언뜻 사람의 피와 같은 붉은 빛이 보여서 이제는 인주(印朱)마저 치워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피나 신경 따위는 비치지도 않는 한 장의 백지(白紙)로 남아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맞으며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눈을 만들어 뿌리기도 하면서 한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시평]
우리는 가장 순수한 상태를 백지(白紙)에 비유한다.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러한 색채도 곁들이지 않은, 말 그대로의 하얀 종이 그 상태. 이러한 백지와 같은 상태의 마음으로 한겨울을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때로는 허전하기도 하여 마음의 한 귀퉁이를 문진으로 눌러놓고,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유인이나 찍어보다가, 꾸겨버렸던 마음. 그 마음까지도 모두 버린, 그래서 하얀 백지와 같은 마음으로.

한겨울은 우리를 어쩌면 주눅 들게 한다. 잎 떨어진 나목들과 차가운 바람 속 웅크린 사람들. 그런 겨울을 보내는 마음은 어쩌면 허전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겨울을 백지와 같은 마음이 되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나 맞으며 하늘에서 눈이 내리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눈을 만들어 뿌리기도 하면서 한겨울을 보내고 있다면, 실은 그 마음 가장 따뜻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가장 안온한 백지의 그 마음, 마음이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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