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흑백 TV 시절 프로 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프로 레슬링 경기가 중계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TV가 있는 집에 모여들었다. 김일 선수가 덩치 큰 서양 선수의 머리에 박치기를 꽂아 쓰러뜨리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여금부 선수가 일본 선수의 머리통을 허리춤에 꿰어 차고 알밤을 먹이면 조무래기들이 좋다며 소리를 질렀다. 태권도 고수인 천규덕 선수가 상대의 가슴팍에 당수를 때리거나 장영철 선수가 몸을 던져 두 다리로 상대의 목을 휘감아 쓰러트리는 장면도 볼만했다. 프로 레슬링 중계 다음날이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김일 선수의 이마에는 철판이 박혀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곤 했다.

순진한 시절의 이야기였지만 나름 진지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일제시대의 치욕과 어려움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들로부터 생생하게 들었고, 학교에서도 일본 놈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가르쳤다. 유관순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던 시절이었다. 일본과 일본 놈들에 대한 미움이 가슴 깊이 박혀 있던 시절, 비록 쇼일망정,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를 쓰러트리는 장면은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프로 레슬링이 짜고 치는 쇼라고 어느 프로 레슬러가 말하는 바람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프로 레슬링도 무대에서 내려오고 프로 레슬링이 국민들에게 주었던 통쾌함과 즐거움도 사라지고 말았다. 짜고 치는 경기일망정, 미운 일본 놈과 덩치 큰 서양 선수를 때려눕히는 장면은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용기를 불어넣었던 게 사실이다.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던 프로 레슬링은 사실 일본 사람들이 먼저 했던 것이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하자 미국 등 서양 세계에 대한 미움과 열등감이 더욱 커졌다. 일본은 2차 대전 훨씬 오래 전부터 서양 국가들을 모델로 삼아 서양의 세계로 편입되고 싶어 했다. 그런 일본 사람들이 2차 대전에서 무참하게 깨지자 극심한 열등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때 서양 특히 미국의 덩치 큰 사람들을 데려다 때려눕히는 프로 레슬링이 열리자 일본 사람들이 열광했다. 이것을 벤치마킹해 우리나라에서도 김일 선수나 여금부 선수가 일본 놈을 상대로 헤딩을 꽂거나 알밤을 두드렸던 것이다. 미운 일본 놈을 대상으로 분풀이하는 방법으로는 최고였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도 일본선수를 상대로 한 권투경기는 민족의 울분을 달래는 최고의 스포츠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이 열리기 전 일본의 와세다대학 선수들이 와서 권투 경기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선수가 모두 KO승 했다. 와세다대학 선수가 코너에 몰려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심판이 말리지 않았다. 심판은 한국 사람이었다. 이것을 조선총독부에서 문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시절의 권투는 나라 잃은 국민의 울분을 토해 내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하지만, 각본 있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극적이기도 하다. 계절 없이 스포츠 대회가 열리고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좋은 세상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