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문화칼럼니스트

올해는 걸들의 시대였다. 소녀시대의 <지(Gee)>로 시작된 소녀 열풍이 카라, 브라운아이드걸스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걸그룹들의 잔치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지지지’거렸고, 색색의 스키니 진이 알록달록 거리를 물들였다.  카라의 엉덩이 춤에 남자들이 넋을 잃었고, 그야말로 시건방지게 춤을 춘 브라운아이드걸스는 백억 원대의 수입을 올렸다. 꿀벅지란 말이 논란을 일으켰지만, 어린 그녀들도 섹시하지 않으면 주목 받지 못하는 시대임을 거듭 증명했다. 귀엽거나 청순발랄한 소녀들은 초딩들마저 하품난다며 외면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걸들이 잔치판을 벌이는 사이, 보이들은 우울했다. 슈퍼주니어 강인이 폭행사건에 휘말렸고 동방신기는 소속사와 법적 분쟁했다. 빅뱅 멤버 대성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권지용은 표절논란에 휩싸였다. 아이돌 그룹 출신 J군은 10대 성매매 사건에 연루됐다. 2PM의 박재범이 연습생 시절 남긴 인터넷 상의 글로 인해 마녀사냥식 집단 이지메를 당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사건은 우울의 극치였다.  

남성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가 음반 판매고 20만장을 기록하며 소녀팬들의 저력을 확인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오빠만을 죽어라 외쳐댔던 어린 소녀들이 또래의 그녀들에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올해 새롭게 목격된 현상 중 하나다.  

흘러간 청춘들은 새파란 그들의 열정과 환호가 그저 부러울 뿐인데, 마이클 잭슨의 죽음으로 그들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 하나 생겨버렸다. 한때는 마이클 잭슨의 명 히트곡 <빗 잇(Beat it)>에 맞춰 삿대질 춤을 추었던 올드들은 그저 세월이 무상하다 할 뿐. 이미자와 조용필은 각각 데뷔 50주년과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흘러간 청춘들의 마음을 달랬다. 고마운 존재들이다.           

막장 드라마의 악다구니와 황당함도 올 한 해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아내의 유혹>과 속편 격인 <천사의 유혹>, <밥줘> 등이 대표 막장 드라마로 이름을 올렸는데, 뭐 저런 게 다 있어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한 사람들 덕분에 그들이 지상 최고의 목표이자 가치로 삼는 시청률만은 제대로 챙겼다. 막 가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된다, 더 독해야 된다는 그들의 굳건한 신념이 반짝 반짝 빛이 났다.

키스하는 두 입이 나무 기둥에 가려지거나, 남녀가 끌어안기까지는 했으나 창문밑으로 사라져 버린 경우 혹은 남녀가 훌러덩 옷을 벗긴 했으나 물레방아 돌아가는 모습만 화면 가득 비쳤던, 그래서 잔뜩 약만 올랐던 그 옛날 영화가 오히려 그리운 건, 막 가는 것보다 차라리 약이 좀 오르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드라마에서처럼, 지금 임신중이랍니다, 하며 결혼 발표하는 스타 커플도 올해 유독 많았다. ‘선 섹스 후 결혼’이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개인적인 일에 이렇다 저렇다 입을 댈 것은 아니라는 듯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는 건, 분명 격세지감이다.   

<해운대>가 관객 1000만 시대를 이끄는 등 위너들이 있었지만, 죽어라 일하고서도 제대로 돈을 받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화려한 그들의 세계에 드리워진 암울한 자화상이다.
처음 영화계에 뛰어들면 운동화 한 켤레 값의 임금을 받는다는 소문이 아니 땐 굴뚝의 연기가 아닌 모양이다. 영화 한 편 찍으면 스태프 한 명당 평균 800만 원 정도 받고, 한 스태프 당 연간 제작 참여 편수가 1.5편이어서 평균 연봉이 1000만 원쯤 된다고, 영화진흥위원회와 영화노조가 최근 밝혔다. 그나마 12월 중순 현재 임금체불 건수가 41건으로 작년 32건보다 28%나 늘었다.

영화 한 편 찍고 수억, 수십억 원씩 받았다는 일부 스타들의 자랑 뒤에는, 그들의 말대로 ‘밥상 잘 차려’ 주는 스태프들의 한숨과 눈물이 뒤따라 다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스타들 몸값을 덜 주더라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스태프들의 임금을 먼저 챙겨주도록, 법을 만들어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올 한 해도 누군가는 섹시하게 또 누군가는 엣지있게 또 어떤 이는 근사하고 우아하게,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개그했으므로, 즐거웠다. 즐거웠던 한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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