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86아시안게임의 최고 스타는 육상 선수 임춘애였다. 그녀는 800미터와 1500미터, 30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에 올랐다. 안방에서 열린 세계적인 대회에서 무려 3개의 금메달을 따내자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녀가 ‘라면만 먹고’ 달린 불우한 선수였다고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라면만 먹고’ 달리지 않았다. 코치가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말한 것을, 기자가 ‘라면만 먹고’ 달렸다고 뻥튀기 한 것이다. 그녀는 후에 당시 도가니탕, 뱀탕도 먹었으며, 자신을 ‘라면 소녀’로 기억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국민들은 그녀가 86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3개나 땄으니 2년 후에 열린 88서울올림픽에서도 당연히 메달을 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메달을 걸지 못했다. 그녀가 배가 불러 제대로 뛰지 못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가 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배가 불렀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어린 나이에 너무나 혹독하게 훈련을 한 탓에 몸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수준이 얼마나 다른지 몰랐다.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입술이 터진 복서가 필리핀이나 태국 선수를 때려눕히고 챔피언에 오른 소감을 말하는 모습이 흑백 TV에 등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계석 뒤로는 조무래기들이 까까머리를 부딪치며 얼굴을 들이미고 있었다. 입이 돌아간 복서는 글러브를 낀 채, 마침 걸려온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선 황공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사람들은 챔피언에 오른 그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린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감동을 받았다.

아무튼 그 시절에는 배가 고파야 운동을 한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그때는 나라가 가난했고 누구나 가난한 시절이었지, 특별히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귀한 집안’에서는 운동을 잘 시키지 않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지만, 누구나 배가 고픈 가운데 운동도 하고 놀기도 했다. ‘헝그리 복서’는 유독 가난한 집 아이만 되는 게 아니라, 누구나 ‘헝그리 정신’으로 살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이제는 ‘헝그리’ 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자식을 운동으로 성공 시키려면 집 한 채 말아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학교에서 운동부를 운영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부분 학부모들이 감당해야 한다.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감독에게 밉보여 뒷자리로 밀릴 수도 있고 상급학교 진학에 물을 먹을 수도 있다.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일수록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운동뿐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 등 예능 교육도 돈 없으면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한다. 비싼 장비와 고가의 레슨비용 등 웬만큼 살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타고난 재주를 가졌어도 돈으로 받쳐주지 못하면 예고와 일류대학이라는 그들만의 리그에 합류하기 힘들다.

아이들 교육이 이 모양이 된 것은 공교육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가리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면, 돈 없어 재능을 못 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는 집 아이들도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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