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배설(Ernest Bethell: 1872. 11. 3~1909. 5. 1) 선생 서거 제106주기 경모대회’가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재룡) 주최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공원에서 열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이경숙 기자] 1일 ‘배설(Ernest Bethell: 1872. 11. 3~1909. 5. 1) 선생 서거 제106주기 경모대회’가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재룡) 주최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공원에서 열렸다.

한국의 항일언론인 배설(고종황제에게 하사받은 한국명)은 영국 출신으로, 1904년 3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돼 한국으로 파견됐다.

배설은 서울에 도착한 후 4월 14일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으로서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최초로 송고한다. 하지만 배설은 기사 송고 후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게 된다.

▲ 배설(Ernest Bethell: 1872. 11. 3~1909. 5. 1) 선생
당시 배설은 “크로니클지는 편집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실정을 직접 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이에 크로니클지는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크로니클지는 나를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며 해임 이유에 대해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크로니클지를 그만둔 후 배설은 우국지사 우강(雩岡) 양기탁과 뜻을 같이해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KDN)를 창간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민족지로서 항일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과 문화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을 활발히 보도했으며,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향력 있는 언론으로 발돋움했다.

배설 항일언론 투쟁을 연구해온 서울치대겸임교수 정성화 박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됐을 당시, 대한 국민은 일본의 한반도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을 격렬히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장성관방장관을 역임한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요구한 황무지개간권은 ‘대한 땅의 황무지개척 및 경영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나가모리에게 50년간 위임하고, 그 후 다시 50년간 사용권을 연장해 달라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것”이라며 “배설 선생은 불법적인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적극 반대하는 기사를 연일 보도했고, 이에 고종황제는 일제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배설의 공로는 뒤늦게 빛을 발해, 1968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전 국무총리 이현재 박사를 비롯해 전통전례보존회 이삼목 회장, 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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