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독립투사(6)

▲ 해공 신익희 선생.
“우리는 현실을 직시(直視) 정시(正視)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仇敵)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돼 망국으로 치닫게 되자 역설적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극일의 심정으로 일본유학을 단행한 이가 있다.

그는 바로 일제강점기에는 투철한 민족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反독재민주정치가로, 또 민족교육운동가로 잘 알려진 해공 신익희(申翼熙) 선생이다.

1892년 경기도 광주 출생인 해공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중시하고 지행합일의 실천정신을 강조하는 양명학 가문이었다.

하지만 해공이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1910년 완전한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해공은 신학문을 수학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12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한 해공은 고학으로 학비를 조달하며 정세윤, 송진우, 문일평 등과 학우회 조직하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을 발간해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에 나섰다.

특히 1913년에는 윤홍섭, 장덕수 등과 단지(斷指)한 뒤 피를 나눠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고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중동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비교헌법과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하면서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섰다.

1918년 6월경 국내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자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한 해공은 그해 11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밀의한 뒤 만주·노령·상해 등지의 독립운동계를 순방하며 공동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또 그는 3.1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3.1운동 거사를 설명하면서 이시영, 홍범도, 문창범, 김우진, 조소 등도 만나 거사를 모의하고 다음해 1919년 2월 귀국, 3.1운동을 지휘하다 일경의 지명체포령을 피해 3월 10일 상해로 망명했다.

▲ 해공 신익희 선생 부부.

이후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선출위원으로 참석한 해공은 이시영, 조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 발탁돼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이용곤(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은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비교헌법을 강의했기에 임시정부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시헌장’을 해공 선생이 주도적으로 제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해공은 1919년 8월 법무차장에 임명됐으며, 1920년 9월에는 외무총장이 됐다.

이후에 내무·외부 차장, 문교부장, 내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해공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정당에서 활동하면서 기회가 날 때마다 민족교육운동에 역점을 뒀는데 주로 무장투쟁 중심의 군사교육에 치중했다.

이 운영위원은 “해공 선생의 민족교육운동의 방향은 군사교육 중심이었다”며 “이는 평소 군사 본위의 독립운동 방략을 견지해온 해공의 사상이 표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 후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으며,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유세 중에 전북 이리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숨졌다.

정부는 해공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
▲ 해공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묵(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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