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미산책] 古書에 등장하는 ‘포’
[별미산책] 古書에 등장하는 ‘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지난날 중국에서는 말린 고기를 선물로 많이 사용했고, 특히 학문을 익히려고 어떤 스승의 제자로 입문을 할 때에는 말린 고기 묶음을 사례로 주고받는 관습이 있었다. 이로 인해 진상물이나 선물로 바치려고 포개어서 묶은 포를 ‘속수(束脩)’라고 부르게 되었다.

‘논어(論語)’에 “자(子)가 말하기를, 속수(束脩)를 행하는데 어찌 가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공자가 탐욕이 많거나 고기를 유난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행위가 당시의 예의에 적법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근래까지 자루 속에는 돈을 넣고도 겉에는 사례라는 뜻으로 ‘속수(束脩)’라는 글을 써서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남송시대의 사람인 주희가 편찬한 예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보면 “포(脯)라 이르면 육포(肉脯)와 어포(魚脯)로 구분되는데, 육포는 두미(頭尾)의 구분이 불가능하나, 어포가 두미 식별이 가능하면 어(魚)와 마찬가지로 두서미동(頭西尾東)의 법도를 따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포에 대한 문헌은 1145년에 김부식(金富軾)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신문왕 3年(683)의 기록에 보면 결혼예물로 포(脯)가 들어있었다. 이는 육류를 얇게 저며서 말린 오늘날과 비슷한 육포가 이 시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육류를 말려 저장하는 방식은 삼국 이전부터 있어 왔으나 이때는 대개 고기를 통째로 말려 저장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포는 한 단계 발전한 육류가공법인 셈이다. 당시에 실시되던 포 가공법의 상세한 기술면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그대로 말린 것(소건법), 소금간을 하여 말린 것(염건법), 소금과 술에 절여 말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때 문헌인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송나라 사신 서긍에게 접대한 술상에 육포가 차려져 있었다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에 중종 25년(1530) 중종의 명에 의해 이행·윤은보·신공제 등이 펴낸 관찬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물산품목에 육류 포로는 꿩 고기포, 사슴고기포가 명기되어 있다.

정부인 안동 장씨(1598~1680)가 딸과 며느리들에게 전하기 위해 정리한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는 고기 말리고 오래 두는 법이 기록되어 있으며, 1766년에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조편포법(造片脯法)’이라 하여 쇠고기 또는 꿩고기를 섞어 곱게 다져 기름과 장으로 간을 하여 판상으로 말리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궁정요리통고(1957년)’에는 약포와 장포 만드는 법이 소개돼 있으며, ‘정조지’에는 우육배포법 장포법이 기록되어 있다. 1809년(순종 9) 빙허각 이씨가 쓴 ‘규합총서’에는 약포법과 치육포법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육포로 고기를 저장해 놓고 국을 끓일 때 조금씩 넣기도 하고, 곱게 갈아서 '소고기다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지금은 육포라 하면 으레 소고기 말린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고기가 귀하던 시절에는 마포(馬脯)·구포(狗脯)나 산짐승이 흔해서 녹포(鹿脯)·노루포(獐脯)·치포(雉脯)를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특히 녹포를 제일로 쳤다.

마포는 고려 말엽에 몽고말을 기르는 목장이 제주도에 설치된 후로 말고기를 먹기 시작하여 말고기 육포가 생겨나서 점차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진상을 빙자한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1401년 조정에서는 '마포'의 진상을 금지하게 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어포는 짐승고기 대신 비린내가 비교적 적은 생선 흰살을 얇게 저며 만든 것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오징어포나 쥐치포는 손쉽게 차려낼 수 있는 훌륭한 마른안주다. 예전에는 암민어의 배를 갈라서 소금에 절여 말린 암치포와 가오리포·대구포·문어포 등이 제사상에 오르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