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나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쥐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뜨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풀잎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을/ 그제서야 알고/ 감사하며 길을 걸었다’

정호승 시인의 ‘감사하다’라는 시다. 태풍이 지난 뒤 키 큰 나무들은 쓰러지고 부러졌지만, 키 작은 나무나 풀들은 온전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처지 또한 키 작은 나무나 풀처럼 아무 탈이 없으며 그것이 고마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풍은 키 큰 것들을 쓰러뜨리고 그래서 작은 것들에 위안을 줄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부는 바람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모진 바람이 불고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요란을 떨고, 떵떵거리고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천지개벽해서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알고 싶은 것을 알지도 못하고, 세상이 바뀌지도 않는다.

무수한 말들이 오가고, 중요한 것들이 잊혀지고, 큰일이 날 것처럼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어느 날 일제히 입을 다물면, 세상은 언제 그랬다는 듯 고요해진다. 태풍에 쓰러지질 줄 알았던 키 큰 나무는 여전히 두 팔 벌려 햇볕을 즐기고, 키 작은 나무나 여린 풀들은 꺾이거나 뿌리가 뽑힌 채 고요하게 시들어갈 뿐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상처 받은 누군가는 남몰래 아픔을 삭일 것이다. 잔가지 몇 개쯤 잘라낸 키 큰 나무는 여전히 큰 그늘을 드리운 채 키 작은 것들을 압도하며 건재를 과시할 것이다. 세상의 풍경이 늘 이와 같았다.

고독한 그들은 혼자 밥을 먹다 아무도 몰래 숨을 거두고, 불러 줄 곳 없는 청춘들은 골방에서 시름에 잠기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으나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고,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더욱 강력해진 무기를 들고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킨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지킬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지킬 것이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지킬 것이 없어지고 마침내 잃어버릴 것도 없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렇고, 그런 세상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성부 시인의 ‘벼’)

벼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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