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권택 감독이 102번째 작품 ‘화장’을 들고 대중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임 감독은 지난달 31일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에 위치한 ‘스몰하우스’ 카페에서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은 인터뷰 전 포토촬영에 임하는 임 감독 모습. (사진촬영: 이혜림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이현정 기자] 지난 7일 한국영상자료원은 프레스센터에서 40~80년대 만들어진 국내 극영화 94편을 발굴하고 언론에 공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1970년대 종로에서 순회 영사업을 하던 연합영화공사의 한규호 대표로부터 기증받은 94편의 극영화에선 이만희, 임권택, 김수용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의 작품이 포함돼 화제가 됐다. 이 뜻 깊은 날에 자리했던 임권택 감독은 “차라리 발굴되지 말았으면 좋았을 법 한 내 영화들을 이렇게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늘 작품들로부터 도망치는 감독의 영화이지만 당시를 알 수 있는 기록물이 될 것이라 본다”며 의미심장한 소감을 전했다.

임권택 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10년간 약 50편의 영화를 찍었다. 임 감독은 당시를 ‘남작을 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많은 영화를 대중에게 전달했지만 영화의 완성도나 촬영환경 등이 열악했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더 강하게 말하면 그는 당시 영화들을 ‘꼴도 보기 싫은 영화’라고 표현할 정도로 감독으로서의 신념을 찾아볼 수 없는 아류작이라고 스스로는 정의했다.

하지만 임 감독의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깊은 한국의 고전미를 표현해내는데 성공했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는 그의 연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명실상부 한국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이자 거장이라 불리는 임 감독. 한국의 고전적 이미지를 한데 모아내고 있는 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색다른 영화가 이름을 올렸다. 바로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얼굴 사이에 중년 남성이 겪는 욕망을 그린 ‘화장’을 통해 소통이라는 다른 과제를 풀고자 하는 노장의 도전이 시작됐다.

지난달 31일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인근에 위치한 카페에서 임 감독과 천지일보와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연일 계속되는 해외일정과 국내 언론사 인터뷰로 감기몸살을 앓았던 임 감독은 두터운 크르덴 외투를 입고 투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언론 인터뷰로 강행군을 진행한 임 감독은 노곤한 상태였지만 영화에 대한 질문에 금새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였다.

이번 ‘화장’은 ‘임권택표 영화’라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영화였기에 그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않고 깊이 있게 답변했다.

‘젊은 층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나도 궁금하다’라며 의구심 반 연륜 반 노장의 지혜가 스며든 ‘화장’, 그가 들려주는 102번째 영화에 대해서 들어보자.

-벌써 102번째 감독의 프레임이 완성됐다. 감회가 어떤가?

별 것 없다. 이는 지난 100번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그마한 영화 한 편 만들어서 알게 모르게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유럽 쪽에서 100번째 영화를 두고 관심을 가져 주면서 부풀려 지더라. 100번째라고 갑자기 힘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만그만한 영화 찍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100번째가 그랬는데 102번째라고 다를 것 없다. 단지 기억에 남는 영화를 찍었느냐 못 찍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한국의 고전미를 현대적 감각으로 연출해왔다면 이번 ‘화장’에선 중년 남성의 시각으로 보는 인간의 욕망을 그려냈다는 것이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감독이 요구하는 영화적 메시지가 있다면?

‘화장’은 드라마라고 할 것 없이 남자 주인공 ‘오상무’가 신입 여직원 ‘추은주’에게 쏠리는 정신적 추이를 관념화시킨 내용이다. 사실 백편 넘게 판소리 등 우리 문화를 포함한 수난사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이번 ‘화장’처럼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는 그동안 없었다. ‘화장’은 ‘임권택표 영화’라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의 ‘임권택’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감독으로서의 생명력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고 개인적으로도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지 방법을 찾지 못한 가운데 제작사인 명필름과 손을 잡고 ‘화장’을 연출하게 됐다.

-김훈 작가의 ‘화장’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욕망이라는 주제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완벽한 앙상블의 연출이 돋보인다.

그전부터 김훈 작가의 문장을 영상으로 옮기고 싶었고 이번 ‘화장’을 통해서 시도했지만 쉽지는 않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사실 힘든 작업이었다. 그래서 ‘사실감’에 주력했다. 어차피 김훈 작가의 ‘화장’에서 나타나는 감정선이 오상무의 관념과 환각 속에서 만들어지는 부분인데 이를 잘못 따라가면 내용이 들떠 보일 수 있기에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이를테면 ‘빠져’나왔다.

▲ 임권택 감독이 102번째 작품 ‘화장’을 들고 대중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임 감독은 지난달 31일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에 위치한 ‘스몰하우스’ 카페에서 천지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은 인터뷰 전 포토촬영에 임하는 임 감독 모습. (사진촬영: 이혜림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오상무가 느끼는 욕망을 아슬아슬하게 그려내는 ‘화장’은 자칫 한국사회의 도덕적 관념에서 질타 받을 수 있는 소재로 보인다.

암 투병 중인 아내를 사랑보다는 함께한 오랜 세월의 책임감으로 병수발을 하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아픈 아내를 돌보는 오상무의 감정선이 영화의 포인트다. 삶과 죽음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중년 남성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심도 있게 그린 영화는 ‘축제’ 때. 하지만 뒤돌아보면 ‘축제’를 연출할 당시 내가 죽음을 너무 치장했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나이가 여든이 되니까 들더라.

-연륜이 쌓여서 더욱 지난날의 작품들에 아쉬웠던 부분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진짜로 ‘축제’는 젊었을 때 죽음을 치장하면서 찍었다고 생각한다. 여든에 들어서자 영화 찍을 때 그런 치장이 없어지더라. 나이만큼 보이게 되니까. 살면서 누적된 것들이 쌓여서 안에서 발효되는데 딱 그만큼 영화를 찍게 되는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다 젊게 영화를 찍어보려 해도 안 된다.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이상도 그 아래도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피어오른 욕망에 대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영화적 표현에 있어 가장 임팩트 있던 ‘침대씬’과 ‘욕실씬’이 의외로 여배우의 노출이 더 화제가 됐는데 감독으로서 이러한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나.

두 장면은 모두 영화에서 사실감을 살리는 중요한 장면이자 대표적인 장면이다. 몸을 가누지 못해 남편에게 병수발을 받으면서 미안함과 수치스러움을 동시에 표출해 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노출장면으로써 사실감을 살렸다. 사실 이번 ‘화장’을 하기 전까진 김호정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로 그녀가 얼마나 강한 여배우인지 알게 됐다. 시나리오에선 ‘욕실씬’에 노출이 없었다. 욕실 세트에서 두~세 번 촬영했지만 맛이 안 살더라. 촬영을 중단시켜 놓고 김호정에게 부탁했다. 노출해 달라고. 치부를 드러냄으로 더 아름다운 씬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촬영 시간이 넉넉지 않았던 때라 세트장을 허물었어야 했는데 김호정이 수락만 한다면 다시 욕실 세트장을 지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김호정은 2시간 후에 ‘YES’를 외쳤고 나는 ‘아~ 이 여배우 굉장히 단단한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됐다.


임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영화관에서 짧게 단정했다. ‘영화란,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

노장의 102번째 영화는 그동안 보여줬던 영화와는 달랐다. 하지만 가장 긴밀하게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시대를 그리고 사회를 또 한 중년남성의 내적 갈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노장의 지혜와 거장의 연출로.

한편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 주연의 임권택 감독 102번째 영화 ‘화장’은 지난 9일 국내 개봉했다.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9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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