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시절 각시탈을 쓰고 어디든 나타나 일본 순사들을 골탕먹인다는 내용을 다룬 허영만 화백의 ‘각시탈’ ⓒ천지일보(뉴스천지)

초월적 힘과 종교적 의식 담긴 ‘탈’

우리네 선조들은 어렵고 힘든 시절, 가슴 깊숙이 응어리진 한(恨)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으로 웃음과 해학을 택하고는 했다.

더욱이 조선시대 양반과 쌍놈이라는 극단적인 신분계급을 만들어 놓은 반상제도는 양반이 아니거나 절대적으로 양반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이 실제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타고난 신분이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심신(心身)상에 제약이 가해지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자유와 권리마저도 침해당했던 시절, 사람들은 얼굴에 탈을 쓰고 양반을 해학적으로 표현했으며, 모순된 사회를 풍자했다.

이처럼 탈(가면)은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는 하나의 도구이자, 자신의 본 모습은 드러내지 않은 채 잘못된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의 분출구라고도 할 수 있다.

허영만 화백의 출세작이자 데뷔 당시 작품인 ‘각시탈(1974)’ 또한 이러한 맥락과 함께한다. 한국인 고유의 전통적 정서에 기반한 탄탄하고도 감동적인 스토리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만화 ‘각시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일제 핍박 하에서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해 살아가는 한 한국인 형제의 이야기를 다뤘다.

조금은 멍청하고 모자란 듯 보이는 ‘바보’ 형과 일제의 앞잡이 행세를 하는 동생의 상반된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비록 작고 힘없는 존재이지만 악(惡)과 맞서 싸울 줄 아는 우리네 민족의 강인함과 민족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각시탈’을 쓰고 어디든 나타나 일본군을 골탕 먹이는 존재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바보로만 알았던 자신의 형이 민족의 아픔을 달래주는 ‘각시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일제 앞잡이였던 동생은 제2의 ‘각시탈’이 된다.

허영만 화백의 ‘각시탈’에서처럼 탈이 처음 사용된 것은 원시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원시인들이 수렵 대상물인 동물에게 접근하기 위한 위장면(僞裝面)이었지만 후에는 살상한 동물의 영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그 주술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서 비롯해 점차 종교적 의식과 민족 신앙의 의식용으로 변모, 발전됐다.

탈(가면)이란 한자로 거짓 ‘가(假)’ 낯 ‘면(面)’이니 ‘가짜 얼굴’이란 뜻으로 탈, 탈바가지, 초라니 등으로 불려왔다. 탈이란 말은 ‘탈나다’ 즉 ‘뜻밖에 일어난 궂은 일(변고), 몸에 생긴 병’을 의미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탈’에는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또 다른 자아(自我), 전혀 다른 존재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심지어는 초자연적인 신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인격 내지는 신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탈이란 것을 주변에 가까이 두기를 꺼려했었다는 것이다.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으니 태워버려야 한다는 오랜 속신 때문이다. 그 유래와 그 의미가 어떠했던 간에 ‘탈(가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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