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리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세계의 지도자들 가운에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준 인물이 없다.” 키신저는 하버드대학 교수였으며 석학이었다. 그런 그도 리콴유를 칭찬하는 데는 하등의 인색함도 없었다. 키신저는 리콴유를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지능과 판단력, 통찰력 등에서 빼어난 인물이라고도 했었다. 그렇기에 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한 수 배우려는 의도로 그와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팽창하는 것은 지배 엘리트들의 부패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예컨대 월등히 세력이 우세했던 군벌 장제스(蔣介石) 군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주의 군대에 패한 것도 장제스 군대의 부패에 인민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본다. 반대로 마오나 저우언라이(周恩來), 호치민(胡志明) 등은 청빈, 청렴 이미지로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다. 따라서 리콴유는 자신이 싫어하는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아내기 위해서라도 부패 문제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했고 청렴한 공사(公私)생활을 솔선해야 했다.

그는 일찍이 ‘부패조사국(CPIB)’을 설치해 공직자들을 밀착 감시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그의 가족에 의한 주택매입이 물의를 낳자 자신이 직접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편 리콴유는 공직자들이 뇌물의 유혹에 끌리지 않도록 그들의 월급을 기업체 임원들의 수준으로 올렸다. 고위 공직자들이 명예와 사명감에만 의존한 채 어려운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그렇게 되면 인재가 공무원 사회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1978년 11월 중국의 덩샤오핑(등소평)이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덩은 싱가포르의 발전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가 리콴유에게 말하기를 “1920년에 내가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가는 도중 싱가포르에 들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싱가포르가 형편없는 도시에 불과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라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이에 리콴유는 “중국은 싱가포르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화답해주었다. 덩은 이때 싱가포르 방문을 통해 싱가포르 발전의 기획자이며 지휘자인 리콴유로부터는 물론 몰라보게 발전한 싱가포르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친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개혁개방과 경제 발전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1992년 이른바 ‘남순강화(南巡講話)’ 때 덩은 가는 곳마다 ‘싱가포르에서 배우자.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리콴유의 유언은 자신이 살던 집을 헐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집을 보존할 때 아무래도 그 집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집이기 때문에 경비가 붙어 이웃 주민에 불편을 주고 개발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개발을 못하게 되는 비생산성 등을 우려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유언이 실현될지 말지는 아직은 확실치가 않다. 그의 집을 리콴유의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여론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그 집은 노년의 리콴유가 자서전 집필과 손님맞이를 위해 사용해왔다. 붉은 색깔을 띤 기와로 덮인 건물 2채로 오랜 세월 헐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을 갖게 한다. 자신이 살던 집까지를 헐어버리라고 유언을 남기는 것에서 우리는 리콴유의 결벽증에 가까운 철저한 자기 관리와 나라 사랑, 국민 사랑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그는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강조하기를 ‘지도자가 언론에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한국에 대한 생각과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썩 좋은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말은 이렇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한국인과 대만인을 보조로 활용했는데 한국인은 일본 군인처럼 무자비했다”는 것이 그가 그의 자서전에 쓴 회고담이다. 첫 인상은 이렇게 안 좋았지만 그의 한국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한국인들은 역동적이고 근면하며 의지가 강하고 유능하며 성취지향적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 대해서는 “집권자들이 정신병자와 같은 집단”이라 했다. 북중(北中) 관계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지 않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일본이 핵무장을 하게 되더라도 중국 국경에 미군이 나타나는 것보다는 핵으로 무장한 북한을 중국은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 만한 한마디다.  

리콴유는 경제 활동에는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지만 정치적 자유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한다. 그럼에도 싱가포르의 경제 번영을 기획하고 이끌어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이 결코 부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에도 실패하고 경제에도 실패한 그렇고 그런 존재감 미약한 세계의 대부분 지도자들에 비해 그의 업적은 너무나 뚜렷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왔다 갔다 진자(振子) 운동을 되풀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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