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인간 수명 백세(百歲)가 쉬워 보여도 아직은 여전히 넘기 어려운 높은 고비인 것이 분명하다. 물론 백세 고비를 넘기는 장수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인 것은 맞다. 31년 장기 집권 총리로서 권력의 화신이었던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에게도 그 고비가 쉬운 고비는 아니었다. 그도 그 백세 고비를 향해가다 지난 3월 23일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63년을 동고동락하던 2살 연상의 아내가 5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난 후로 심신의 노쇠가 몰라보게 빨라지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이들 둘은 대학 시절 만난 환상의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즉각 “그는 진정한 역사의 거인이며 현대 싱가포르의 국부이자 아시아의 위대한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고인은 존경하는 어르신이자 중국인의 오랜 친구이며 그의 타계는 국제 사회의 큰 손실”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그는 싱가포르의 국부로서 영감을 준 아시아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세계에서 쏟아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추모와 추모 성명들에 섞여 있는 의례적인 요소들을 감안한다 해도 그가 받는 이 같은 높고 후(厚)한 평가의 진실성은 조금도 퇴색됨이 없는 것 같다.

리콴유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3년 중국 남부 지방에서 싱가포르로 이민 온 부유한 화교 집안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의 집은 그가 대학시절에 몰락해 그를 힘들게 했다. 역시나 대학 시절에 그는 인종 간 갈등과 불화를 겪기도 했으며 사회 부조리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1941년 12월에는 일제가 수천명의 사람을 죽이며 침탈해 들어왔다. 그 만행에 분노하면서도 그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에 일본 말도 배우고 일본군 정보부서에 취직해 연합군의 암호해독 업무를 맡아 일하기도 하면서 그로부터 일본과 추축국의 패전이 멀지 않았음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일본이 패전하자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런던 정경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학과 수석을 놓쳐본 일이 없었다.

드디어 1950년 변호사가 되어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장차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을 꾀해나갔다. 1954년 실용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의 설립을 주도함으로써 사무총장이 됐고 5년 후 36세로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어촌 마을들의 섬인 싱가포르를 세계적인 금융 무역 물류 유통 교통의 허브(hub)로서의 기적을 일구어 놓는 역사의 시발점이다. 오늘날의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GDP)이 5만 달러가 넘는 선진국이다. 리콴유는 경제활동에서만은 완벽하게 자유를 보장했다. 법인 세율이 낮고 양도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다국적 기업인들을 상대로 한 민원처리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덕분에 서울 면적의 1.8배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에 외국 기업이 1만여개, 세계 유수 은행들이 200여개나 진출해 있을 정도다. 실용주의자 리콴유가 이룩한 업적이다. 리콴유의 이런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땅덩어리로는 손바닥만한 소국(小國)일지라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싱가포르나 그 지도자들을 깔보거나 얕보지 못한다. 그야말로 탄탄한 강소국(强小國)이다.

반면 그는 철저한 유교적 권위주의자다. 그것이 국가 운영 이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용어로서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국민을 설득해 ‘영어’를 택했다. 싱가포르의 민족 구성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서 중국계가 75% 이상을 차지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선택하면서 바로 이처럼 머리 숫자가 월등히 많은 중국계의 설득이 가장 힘들었었다. 그렇지만 민족 간의 얽히고설킨 갈등과 불화를 풀 수 있는 방법으로서도 영어를 ‘강력한 공용어’로 선택해 쓰도록 하는 것이 옳고 현명한 방책이란 것이 리콴유의 신념이었다. 싱가포르는 최고의 글로벌(global) 도시 중 하나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 공용어인 영어의 힘이었다는 것과 그것을 공용어로 선택한 리콴유의 선견지명이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싱가포르는 문란해 보이는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다. 리콴유는 “언론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단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그는 또 “당이 정부이며 정부는 싱가포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는 그의 신념과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리에서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충고에도 오불관언(吾不關焉)할 만큼 당당했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이며 그의 싱가포르는 정치 후진국이라는 악명까지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싱가포르는 사소한 위법 행위에 대해서라도 법의 제재가 냉혹하다. 예컨대 비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200~1000달러까지의 벌금을 문다. 껌을 거리에서 잘못 뱉어도 태형(caning sentence)에 처해질 수 있다. 공직자들은 부패 범죄를 저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언젠가 부패 문제에 대해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솔선하지 않으면 어떤 반부패 노력도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바로 이 말은 부패를 없애는 것이 법률이나 제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비상한 결단과 의지가 선행돼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싱가포르의 고민은 잘 사는 사람들이 자꾸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국외로 빠져나가는 일이다. 거기에 출산율마저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다. 설상가상으로 ‘기회가 되면 외국으로 이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는다. 국외 탈출 인구를 보충하려다 보니 2005년 이후 매년 15만명 이상씩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이래서 이민자 비중이 전체 인구 556만명의 40% 가까이에 달하는 형편이다. 싱가포르의 심화되는 빈부격차가 사람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이 정치적 통제를 상쇄할 수 있다고 한 리콴유의 논리가 약발을 다한 것인가. 사실 리콴유 없는 싱가포르의 고민도 이 대목에 집중된다.

리콴유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한국에 왔었다. 그가 한국에 대해 가진 가장 강한 인상 중 두 가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을 발전시키려는 비장한 결의와 의지가 그 첫 번째이고, 노동자와 학생들의 데모대가 거리에서 검투사처럼 무장한 경찰병력과 격렬히 맞서 싸우는 모습이 그 다음이었다. 리콴유는 중국 개혁개방의 시조 덩샤오핑에게도 바로 그 개혁개방에 관해 값진 영감을 주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것은 그가 1978년 현대화된 싱가포르를 방문하고 받은 충격이 촉진제가 돼준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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