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던가(亂世英雄). 임진왜란(1592~1598) 7년의 전란 중 조선을 구한 영웅들을 만났다. 왜군과 맹렬한 전투를 펼치며 전세를 역전시켰던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 각 지역에서 일어났던 의병들이 그러하다. 그중 임진왜란을 논하면서 절대 빠져선 안 될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선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선생이다. 자신의 목숨을 건 파격적 인사 단행으로 왜의 침입에 대비했던 그의 뛰어난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영웅을 어찌 만날 수 있을까. 왜란 당시 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전쟁 중 의정이 맡는 최고의 군직)를 겸하여 슬기롭게 국난을 극복했던 그의 흔적을 찾아 안동하회마을에서 마루대문을 활짝 연다.

 

▲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천지일보(뉴스천지)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안동하회마을

하회마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경상북도 정중앙에서 북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안동은 유교의 고장이자 전통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안동시에서 차로 40분 정도 달리다 보면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인 하회마을에 다다른다.

 

 

 

 

‘하회(河回)’란 이름은 안동시 중심에서 서쪽을 향해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S'자로 마을을 호위하듯 감싸고 돌아나가는 형태에서 유래됐다. 하회마을은 산을 등지고 마을 앞쪽으로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해 살기 좋은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하회마을은 수태극과 산태극이 그려진 곳에 자리해 마치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풍수지리에 따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조선인물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물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당인 이유에서 일까. 이중환의 말처럼 이곳 안동하회마을에서는 조선의 대학자 겸암 류운룡(謙庵 柳雲龍, 1539~1601)과 명재상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를 비롯한 주요 관직자 및 유학자가 많이 배출됐다.

탐방팀은 실학의 대가이자, 선구자요, 정치가요, 개혁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류성룡 선생의 흔적을 따라 하회마을을 찾았다. 916번 지방도로를 타고 하회마을에 다다르자 마을을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 부용대 전경. 부용대를 마주보고 왼편에는 류운룡의 겸암정사가, 오른편에는 류성룡의 옥연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이어 강 건너에 우뚝솟은 부용대(芙蓉臺)를 마주 하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태백산맥 줄기 맨 끝부분에 위치한 부용대는 높이 64m의 기암절벽으로 낙동강 물줄기에 의해 오랜 시간 침식작용을 받아 형성됐는데, 그 깎여진 모습이 마치 산을 반으로 잘라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듯하다. 부용대 절벽에 겹겹이 쌓인 지층은 억겁의 세월을 이겨낸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소나무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부용’이란 명칭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연꽃’을 의미하는데 부용대 정상에 오르면 연꽃모양을 닮은 하회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절벽의 정상이 ‘연꽃 봉오리’를 닮았다 하여 부용대라 불리기도 한다.

일행은 부용대에 오르기 위해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부용대 절벽 앞 나루터에 도착했다. 부용대 아랫 자락에 자리한 화천서원 뒤로 솔길을 따라 약 200m 오르면 금새 부용대 정상이 보인다. 짧은 코스를 오르는 동안에도 한눈에 내려다보일 하회마을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그저 설렌다.

부용대 정상에 오르자 조선 유교문화의 산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하회마을 전경이 한번에 들어온다. 양반이 살았던 기와집에서부터 시작해 평민들이 지냈던 초가집, 서원, 서당 등에 이르기까지 유교정신이 반영된 전통가옥이 옹기종기 잘 유지되고 있었다.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며 흐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형상으로 보는 이에게 신비로움 마저 느끼게 한다.

징비록(懲毖錄)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 옥연정사 앞으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부용대 정상을 중심으로 낙동강 상류 쪽에는 겸암 류운룡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지은 겸암정사(謙菴精舍)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하류 쪽으로는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자리하고 있다.

 

 

 

 

▲ 옥연정사 현판

옥연정사에서 절벽 쪽으로 난 간죽문(看竹門)을 나서면 강 건너편으로 하회마을이 내다보인다.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절벽 허리 부근에 층간 사이로 소로(小路)가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길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절벽을 가로지르는 소로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마치 비밀 통로를 발견한 것처럼 호기심이 생겼다.

한 사람이 다니기에도 아슬아슬해 보이는 층길의 거리는 약 400m로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이어주고 있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낙동강 물줄기와 기암괴석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 길을 걸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류성룡 선생은 절벽에 나 있는 층길을 오가며 형님인 류운룡 선생에게 매일 아침 문안을 올렸다고 한다.

또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류성룡은 형님에게 드릴 물건이 있을 때 직접 지게를 짊어지고 짐까지 나르기도 했다. 홀로 걷기도 위태한 이 길을 지게까지 지고 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탐방팀도 400여 년 전 류운룡·류성룡 형제가 오갔을 층길을 따라 함께 걸어본다.

 

 

 

 

▲ 국보 제132호 <징비록> (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옥연정사는 1586년(선조 19) 류성룡이 지은 것으로 흐르는 강물이 부용대에 이르러 깊어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물빛이 옥색을 띤다 하여 정사의 이름을 ‘옥연(玉淵)’이라 지었다고 한다.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懲毖錄), 1598>을 저술한 장소로 유명하다.

‘징비록’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여기징이비후환, 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류성룡이 임진왜란(1592~1598, 선조 25) 7년의 기간 중 몸소 체험한 사실을 기록한 친필 회고록이다. 당시 류성룡은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총사령관으로서 당파 싸움으로 인한 공론 분열, 전쟁의 발발 원인, 전쟁 진행 과정, 전쟁으로 인함 참혹함과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 등을 징비록에 상세히 기록했다.

류성룡은 왜란을 막지 못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염려하는 마음으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교훈을 후대에 남기고자 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난세를 맞은 듯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에 류성룡 선생이 참혹한 전쟁을 막기 위해 미리 징계하였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오늘의 우리는 피의 역사를 더 이상 되풀이 하지 않길 기대해 본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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