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올해도 어김없이 3.1절이 찾아왔고 나라 안팎에서 기념행사가 벌어졌다. 바다 건너 미국 땅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회 주최로 제96회 3.1절 기념식이 개최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대한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인들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따듯하게 대하는 것은 바로 우리 세대가 할 일이지만 세월처럼 잊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작가 박완서(1931∼2011) 선생의 소설 ‘오망과 몽상’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잘 산다’는 아이러니가 아직 우리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다.

꼭 1년 전쯤의 일이다. 국내 최고 발간 부수를 점하고 있는 일간지에 게재된 어느 칼럼니스트의 글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린 지역주민의 글을 읽으며 저어기 놀란 적이 있다.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는 필자는 지면에 오른 글의 전파성에 따른 무한 책임감을 통감하면서 앞으로 역사와 사람에 관한 글, 특히 국민감정이 좋지 아니한 친일 인사와 그들 후손에 관한 글을 쓸 때에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 내용인즉, 지난해 3월 17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필자인 원광대학교 동양대학원 조용헌 교수가 신문에 올린 글이 발단이 됐다. 조 교수는 ‘대구의 女傑’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대구에 거주하는 문○○씨에 관해 글을 올렸는데, “중국에는 등소평이 있고, 대구에는 문소평이 있다”로 시작하는 글 내용에서 문씨에 대해 등소평과 버금간다는 뜻인 ‘문소평’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조 교수가 그대로 칭송하는 이야기로 나타낸 데 있다.

또 조 교수는 문씨에 대해 “돈과 물질에 대해 애착심이 없는 배짱을 지니고 있고, 인생의 산전수전을 거치면서 터득한 통찰력, 그리고 만나는 상대방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인정을 갖춘 여걸이었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문씨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교육받은 내용을 쓰면서, 왜정 때 금광을 캐서 경북 일대의 갑부가 됐던 그의 아버지 문명기(文明琦, 1878∼1968)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가 딸에게 미친 특이한 가정교육까지 적었던 것이다.

조선일보를 통해 ‘대구의 여걸’이란 글을 읽은 경북 청송에 사는 지○○씨가 느낀 비애와 울분을 지역신문인 고향신문에 올렸는 바, 그 제목이 ‘친일파 후손 문ㅇㅇ씨 극찬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며’였다.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이 전국 도처에서 부(富)를 굴리며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반면에,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군이나 의병장의 후손들은 가난에 치를 떨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은(報恩)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는 정의로운 글이었다.

지ㅇㅇ씨는 “제95주년 3.1절을 기념해 제30회 영해 3.1절 호국정신문화제의 전야제가 개최된 17일 조선일보의 글을 접했다. … 후손이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글을 올린 시기가 하수상하다. 그것도 영해에서는 3.1절 기념 호국정신문화제 행사가 개최되는 날 하필이면 친일파로 이름을 떨쳤던 문명기씨의 후손을 극찬하는 글을 올려야 했을까 싶다. 조용헌 교수의 역사의식이 의심스럽고 가슴치고 통탄할 일이다. 1878년생으로 일제 치하 대표적 매판 자본가였던 문명기. 일제로부터는 애국옹(愛國翁)이라는 호칭을, 식민지 민중으로부터는 야만기(野蠻琦)라는 비아냥을 받으면서도 일본에 비행기와 군함 헌납 운동에 앞장섰다”고 썼다.

그러면서 “본인이 살고 있는 진보면 진안리에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양자 신병욱씨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끼니가 없을 정도로 허덕이며 살았는데, 친일파의 후손인 문ㅇㅇ씨는 어릴 적 황금덩어리를 가지고 놀았고 지금은 대구지역의 여류명사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려니 참…” 하고 서술하면서, “독립의 기운이 가장 강렬한 3월에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한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허덕이는 삶은 뒤로 하고, 모든 영화 누리고 사는 친일파 후손들의 삶을 극찬하는 이 나라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조선일보의 글을 보는 암담한 심정이란…” 글로 끝을 맺었으니 한탄의 글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조용헌 교수가 종전에 ‘食神生財(식신생재)… 베풀어 인심을 사면 돈은 따라 온다’는 칼럼에서 문명기를 주인공으로 삼아 글 쓴 적이 있어 문ㅇㅇ씨 아버지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잘 알고 있던 차에, 대구지역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문씨에 관해 들은 이야기와 직접 그녀를 만나보고 난 뒤 좋은 면을 칭송한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3.1절의 의미가 퇴색돼가는 시기에 경북 청송 주민의 비분강개(悲憤慷慨)는 새겨들어야 할 충언(忠言)이다. 애국지사 신돌석 장군의 부인은 힘들게 살았고, 직계는 대가 끊어졌건만 일제 때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한 아버지를 둔 딸은 ‘대구의 여걸’이라는 칭호로 살아가고 있으니 역시 시대적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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