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우리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압도적으로 본회의를 통과시킨 법안을 바로 다음 날 다시 손봐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그러려면 무엇 때문에 법안 처리를 그렇게 서둘렀는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이 바로 그 ‘불량 제품’과 같은 법안이다. 사실 국회의원들은 그 법이 말썽이 날 것을 알고 있었다.

본회의에 가기 전 관련 소위에서 그들 스스로 ‘법안이 옳은지 확신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오리려 진짜 나쁜 사람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 아닌가’ 등의 말을 공공연히 토해냈었다. ‘법 적용 대상에 국고 보조금 받는 시민단체는 왜 빠졌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법안을 표류시킨다고 비판받을 게 두려워 제대로 절차를 못 밟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입법권 남용’이라는 얘기도 있었고 ‘위헌성이 있다’는 말도 나왔다.

이렇게 문제를 조목조목 그들 스스로가 잘 알면서도 완전한 ‘제품’을 만드는 노력은 포기했다. 부끄럽게도 이런 사람들이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들이다. 가슴을 칠 일이지만 다음엔 제대로 된 자격자들을 뽑기 위해 눈 똑바로 뜨고 보기 싫어도 예의 살펴보아 둬야 한다.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유권자인 국민이다. 따라서 불량 ‘입법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불량 국회의원들이므로 그 불량 국회의원들 뽑는 불량 유권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해야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는가. 그에 대해서도 그들 스스로의 말로서 잘 드러내주고 있다. ‘여론에 쫓겨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패 척결을 위한 ‘김영란법’의 취지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법안 통과를 서둘러달라고 가하는 압력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린다. 좋다. 그 말이 엉터리없다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말도 엄청 궁색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결코 긴 시간이 걸릴 일이 없다. ‘김영란 법’이 최초로  발의된 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그 같이 말한다면 그 사이 그들은 그 많고 많은 시간을 도대체 뭘 하며 꾸물댔는지를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건대는 기왕지사인데 지금에 와서 그 대답이 그렇게 중요할 일은 없으므로 더 추궁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여론에 쫓긴다고 해도 그렇지 뉘나 돌, 여타 불순물이 섞인 채로 밥을 지어 그나마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채 그것을 국민 앞에 차려 올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 역시 감히 잘한 일이라고 주장하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돌이 씹혀 먹을 수가 없게 된 설익은 밥은 다른 묘안이 없다면 쏟아 버리고 새로 꼼꼼하게 잘 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도 쉽게 발휘되기 어려운 용기다. 엉터리인 것을 인정하고 손을 봐야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을 알았다면 잘못된 법의 시행으로 위헌 시비가 일고 선의의 피해자가 양산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속히 뜯어고쳐야 옳다.  

원래 법안의 발의자는 고위공무원만을 이 법 적용의 대상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초점이 분명했던 법안을 국회의원들이 뭔가를 넣고 빼고 도대체 뭘 하자는 법인지 의도가 아리송한 개악을 해놓았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 자신들과 정당, 새 ‘권력’으로 부상된 시민단체는 빠지고 국민이 낸 세금을 봉급으로 받지 않는 언론인이나 사학 관계자들은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경제 사회적으로 ‘갑(甲)’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들어가야 하며 그런 사람들을 찾아 넣기로 하면 민간 영역의 활력과 자율성, 창발성을 형편없이 짓누르고 죽여 놓을 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특히나 그들이 언론인을 물귀신처럼 물고 들어간 것은 예사롭지가 않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패나 금품수수를 막자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언론 활동을 통제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보자면 언론은 끄덕하면 언론을 고소·고발하는 권력에 눌려 있는 기분이며 회사가 살자 하면 절대적으로 광고가 필요하므로 광고 권력을 가진 대기업들에 결코 큰소리칠 형편도 못된다. 이런 형편임에도 여기에다가 죄가 없으면서도 괜히 쭈뼛거리게 하는 법의 올가미를 눈앞에서 흔들어 대려 하니 여간 주눅 들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사 정부 시절의 언론 통제를 생각나게 하는 실정이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의 궁극적인 향유자는 독자인 국민이다. 그것 역시 국민의 행복에 관한 사항이라면 언론인은 그 행복감의 전달자가 돼야 한다. 그것이 언론인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 언론인에게도 언론 활동의 자유와 자율이 요구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회의원이라면 적어도 언론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그만한 긍정적인 언론관과 개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그들이 언론의 가장 쉬운 비판 대상이기도 하지만 언론의 기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며 그 기능의 향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영역의 사람들을 빼라 넣어라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영역을 넣든지 빼든지 그것 역시 법안이 졸속 처리된 것을 아는 국회의원들이 역시 가장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입법권이 있다 해서 남용하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려 깊게, 양심껏, 소신껏 해야 한다. 쫓겨서 뭐 어쨌다 하는 소리가 다시 나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기 부정이며 국회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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