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봉우 선생.
불멸의 독립투사(5)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함께 선정한 2009년 12월의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은 1880년 8월 1일 함경도 영흥읍에서 태어났다.

민족역사학자 계봉우 선생은 1910년 영생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가르침에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구국운동에 힘썼다.

1911년 초 북간도로 가족과 함께 망명한 선생은 간민회(간민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또한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로서, 후에는 학감으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吾讐不忘)’ 등의 책자를 편찬해 교육 분야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 간 선생은 이상설·이동휘가 주도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에 10여 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은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6년 11월 하마탕에서 일제에게 붙잡혀 강제 귀국되어 3년 간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게 됐다.

1919년 3.1운동 이후 원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북간도 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부임해 1년 간에 걸쳐 의정활동을 펼쳤다.

그 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사료수집위원회의 의원과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유동열·이탁과 함께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이 기간에 한민족의 국외이주와 민족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선생은 ‘사방자’ 또는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아령실기(俄領實記)’ ‘의병전’ 등을 연재했다.

선생은 상해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1920년 4월 한인사회당에 가입해 기관지 ‘자유종’의 주필을 맡았고, 1922년 10월경 러시아의 이만으로 옮겨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될 때까지 고려인소학교·제8호중학교·동방노력자공산대학 등에서 동포 교육과 한글, 한국사의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학예사는 “계봉우 선생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분은 아니지만 몇 개의 필명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며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에도 끊임없는 저술활동을 통해 한글, 역사, 지리 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선생은 또한 1959년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두집해(吏讀集解)’ ‘조선문법’ ‘조선문학사’ ‘조선역사’ 등을 저술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 한글과 한국문학, 우리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보급,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림으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12월 한 달 동안 전시한다. 전시 내용으로는 영생학교·간민회 본부 건물·광성학교 터·권업신문에 연재한 선생의 글 등 선생의 활동 관련 사진자료 18점 등이다.

▲ 계봉우 선생이 ‘권업신문’에 1914년 6월 28일부터 10여 회에 걸쳐 단선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만고의사 안중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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