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그동안 말이 무성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에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이 낙점됐다. 이로써 지난해부터 비서실장 교체설이 불거지고, 또 김기춘 실장이 사임 의사를 표시해 박 대통령이 지난 신년기자회견에서 비서실장 교체 가능성을 언급한 지 한 달 만에 후임 자리가 메워지게 됐다. 이번이 박근혜 정부에 들어 세 번째 교체인데, 초대 허태열 실장의 6개월간 재임 이후 두 번째 그 자리에 오른 김기춘 실장은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비서실을 장악해 실세형 실장으로서 그의 능력을 과시했지만 끝내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메꿔주지는 못한 채 물러났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장관급 공무원이다. 대통령 비서실 직제에 따르면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명을 받아 비서실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 감독한다’는 내용에서 보듯 비서실 사무에 한정돼 보인다. 하지만 청와대 인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행정부 소속 고위 공직자와 공공기관단체의 장, 임원에 대한 검증 등 인사 처리와 함께, 대통령 임명 직위에 오른 자들에 대한 특별 감찰을 담당하는 수장(首長)으로서 기능이 있다 보니 사실상 직무 범위는 국정 전체를 관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맡은 직무도 그러하거니와 국가 최고의 권력자를 언제나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면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여서 더욱 주목받는 자리이긴 하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의 7명의 전임 대통령에겐 28명의 비서실장이 있었고, 그들은 당시 대통령의 통치스타일과 처해진 정치 현실, 비서실의 조직 상태에 따라 그 위상이 천양지차(天壤之差)를 보였다. 어느 실장은 허울만 좋은 껍데기 자리에 만족하기도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때로는 국정 깊숙이에 개입해 ‘권부(權府)의 2인자’ 칭호를 받은 이후락 실장 같은 존재도 있었다.

이후락 실장은 특히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이해하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박 전 대통령의 3공화국 통치의 굳건한 기틀을 만드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5년 10개월 동안 대통령을 보필하면서 청와대 비서실을 명실공히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때 그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로 지칭하던 시절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지근거리에서 대통령을 모시는 비서실장의 자리가 중요하고, 출범 3년차를 맞은 박근혜 대통령의 입지가 초기보다 다소 흔들리며, 또 국민소통이 긴요한 지금의 입장에서, 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차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때에 비서실장의 선정을 두고 청와대 내부나 언론과 여론에서 물망에 올랐던 여러 명의 후보군들에서 벗어나서 임명 7개월밖에 되지 않은 국정원장을 신임 실장으로 결정한 박 대통령의 고심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역할은 최고권력자의 능력과 정치현실이 봉착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비서형, 실무형, 정치형, 실세형으로 분류돼 왔다. 각각의 유형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현대정부로 접어들수록 권위형이거나 실세형은 국민 마음을 얻지 못했으며, 국민 요구가 많을수록 정치형 또는 실무형이 대세를 보였다. 현 상황처럼 대통령이 국민소통에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게 국민여론이었다면 비서실장의 역할은 무엇보다 ‘국민소통’에 우선을 두고 대통령을 보좌해야 했다.

어쨌든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느니만큼 대통령이 선택함은 당연하다. 잠시 화제를 돌려 로마제국 시대의 기틀을 다졌던 군인이요, 정치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해보자. 카이사르를 견제하던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짜고서 갈리아 지방에서 전쟁을 하던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루비콘 강에서 망설이던 카이사르는 “자 나아가자, 신들의 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우리 적들의 음모가 도사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너라!”고 부하병사들에게 외쳤다. 이 일이 있고부터 후세에서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말은 ‘이미 운명이 결정돼 어찌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병기 비서실장 임명은 이미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국정원장 자리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국정 전반을 감안해 외교와 정무 경험이 풍부한 정보통을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핵심 문제는 이 신임 실장의 제대로 된 역할이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서 그 결점을 상쇄시켜주는 능력이 가장 요구되는 조건일진대, 정무 감각이 뛰어난 실무형 평가를 받는 이 실장은 낮은 자세로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마음가짐으로 정치권과 국민여론을 잘 새겨듣고 충언해 대통령과 국민이 원활히 소통하는 가교가 돼야 한다. 그것이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의 진정한 역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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