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동다기(東茶記)’에 나오는 서종망(1648~1717)은 조선 숙종 때 덕천군수(德川郡守)를 역임한 사람으로 이 시대 ‘전의 이씨 동다기(全義李氏 東茶記)’에 저구(猪灸, 돼지구이)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灸)는 ‘불(火)에 오랫동안(久) 굽는다’는 뜻이다.

그는 “내가 막걸리를 몇 잔을 기울인 후 옆을 보니 냉차가 있기에 별로 생각 없이 반잔을 마시고 잠을 잤는데, 가래가 곧바로 차서 십여 일 간 나오고서야 비로소 나았다. 더욱이 찬 것을 먹으면 도리어 가래가 모이게 된다는 말을 더욱 믿게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표류된 사람이 도착해 차병에서 차를 따라 손님에게 권했다고 하는데, 어찌 차갑지 않으리오. 또 소문에 중국어를 통역하는 서종망이 어린 돼지구이를 먹는데, 한손에는 작은 차호를 들은 채 먹고 마셨다고 한다. 틀림없이 이것도 냉차일 것이다. 생각건대 뜨거운 것을 먹은 후, 찬 것을 먹으면 정기(영묘)를 만들지 못한다”라는 시문을 남겼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의 문집(文集) ‘담헌서(湛軒書)’ 외집 10권(外集 卷十) 연기(燕記) 음식(飮食)에는 “북경 이외의 음식점에서는 안주와 반찬에 돼지고기만을 쓴다. (생략) 돼지와 양을 주로 많이 먹고 닭과 거위가 그 다음이며 소와 말은 도살을 엄금하고 있다. 황성 안에 오직 한 곳의 도살장만이 하루에 소 몇 마리를 잡아서 대궐로 들여보낸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1765~1814)과 조카 한진서가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의하면 “조선시대 소고기 한 근이 7, 8푼이고 돼지고기는 한 근에 1전 2푼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 이씨(1759~1824)가 쓴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돼지고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야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風病)을 일으키며 회충(蛔蟲)의 해를 끼치니, 풍병(風病)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쇠고기와 같이 먹으면 뱃속에 벌레가 생기고, 생강과 같이 음식을 만드는 것은 삼가할 것이며, 붕어·양의 간 등과는 같이 먹지 말라.”

홍석모(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매년 정월 젊은 관리들이 횃불을 땅에 끌면서 “돼지 그슬리자, 쥐를 그슬리자”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돼지주둥이를 지져서 돼지가 아픈 주둥이로 곡식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돼지와 쥐는 농사를 망치는 해로운 동물로 받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울러 돼지고기는 독성이 있다고 여겨져 기피되기도 했고, 돼지가 게으르고 더럽고 미련하다는 이유로 돼지 자체를 혐오하기도 했다.

서유구(1764~1845) 형수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에는 ‘저피수정회법(猪皮水晶膾法)’이라 하여 돼지껍질을 고아서 묵처럼 엉기게 해 마치 맑은 수정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1766년에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독자적인 돼지고기 요리법이 드러나 있고 돼지고기의 효능, 위생 등이 설명되어 있다.

1908년 ‘부인필지(婦人必知)’에도 비슷한 요리가 등장 한다. 1931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6판)’에 나오는 ‘세겹살(뱃바지) 배에 잇는 고기(돈육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라는 구절은 삼겹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처럼 삼겹살은 세겹살 혹은 삼층제육(三層猪肉)이라고 불렀다. 조선 요리제법에는 돼지고기를 이용한 조리법으로 ‘저육구의(猪灸)’ ‘제육 편육’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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