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국회의 타이밍을 놓친 법안 처리를 ‘불어 터진 국수’로 대통령이 비유했다 해서 야당이 발끈하고 나섰다. ‘비유’의 주안점은 재건축초과이익환수법 등 ‘부동산 3법’의 늑장 처리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라면 대통령이 국회의 늑장 처리에 몹시 답답해 했을만도 하다. 대통령은 그것을 경제회복의 기폭제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일반의 기억으로도 국회는 짜증이 날 정도로 지루하게 관련 법안들을 국회에 오래 잡아두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에 대해 아무도 생각 못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깜짝 표현을 썼다. ‘불어터진 국수’라고-. 이에 대해 야당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날카로웠다. 이로 미루어 야당 의원들에게 그 표현은  ‘발이 저릴 만큼’ 무척 아팠던 것 같다. 야당 의원들은 벌떼처럼 기자간담회, 트위터, 라디오 인터뷰 등을 통해 그에 대한 격한 반응들을 쏟아냈다. 야당의 어떤 의원은 “대통령이 남 탓을 하며 야당의 ‘협력’을 폄하했다”면서 ‘불통(不通)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 했다. 또 어떤 의원은 ‘국민이 먹어도 되는 국수인지 아닌지 따지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냐’며 ‘야당 탓 그만하시고 미친 전셋값부터 잡고 서민증세(增稅) 멈추세요’라고 응수했다. 또 어떤 야당 의원은 ‘서민들은 불어터진 국수는커녕 국물조차 구경을 못한 채 국수 값만 지불했다’고 말했다. 인내심이 발휘되지 않으면 재반격의 충동을 느낄 만한 언어의 강(强)펀치들이며 당면한 현안의 화두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야당 의원들의 말문이 봇물 터지듯 한 것은 대통령의 발언이 그만큼 자극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바람에 대통령은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것 같기도 하고 방망이로 때리고 홍두깨로 맞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행한 촌철살인식 발언의 위력이 아주 상쇄돼버린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대통령의 말이 국민들에게 남긴 울림이 컸다. 한편으로 야당 의원들의 반응이 격하게 나오는 것은 ‘제발이 저렸기 때문일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국회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불어터진 국수’ 상을 차려주었다면 그것은 여당 탓보다는 야당 탓이라고 흔히 얘기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유에 못지않게 기본적으로는 야당 의원들에게 대통령을 향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쌓여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바로 소통의 문제다. 

그런데 대통령과 야당 의원들의 말싸움에 한 여당 의원도 끼어들어 야당 의원들과 비슷한 비판적 수사법(rhetoric)을 동원함으로써 흥미를 끌었다. 그도 내 편, 네 편으로 분명히 갈라져 싸우는 진영 정치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지만 무작정 ‘내 편’을 감싸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인식은 부동산 3법이 경제 살리는 묘약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그렇게 보기 어렵다’면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굉장히 많은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는 정책 입안자들이나 국회의 법안 심의자들이 간과한 차후의 정책 부작용에 대한 경고와 통찰이 짙게 배어 있다. 이런 경우에 대통령이 자기편인 것을 의식하는 여당 의원들은 의당 습관적으로나 본능적으로 침묵한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불어터진 국수’론이 야당 의원만을 겨냥한 것으로 보는 감각 무딘 여당 의원과 정책 책임자들은 설마라도 없어야 한다. 그런 측면이라면 이 여당 의원은 절대로 자신은 그렇게 무딘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과시했다. 기실 대통령의 말 속에는 야당의 비협조에 대한 답답함은 물론이거니와 국회 설득에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는 정책부서 책임자들과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여당 리더십에 대한 질책이 함께 내포돼있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내를 필요로 하며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는 과욕은 소통을 망친다.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고 그것을 존중하는(agree to disagree) 허허로운 소통 역시 합의나 의사 관철을 이루었을 때의 소통만큼이나 훌륭한 소통이다. 이런 점에서 야당은 대통령이나 여당을 향해  자꾸 ‘불통’ ‘불통’ 하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진짜 ‘불통’이 아닌가도 한 번 성찰해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나 여당이 먼저 그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갖는다면 정치 안정과 국리민복, 국민의 행복을 위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더 강조할 것도 없다. 그런데 현실은 여당 안에서조차 당과 청와대, 당과 정부 간의 대화 부족과 불통이 불만일 정도이니 야당이 대통령과 여당을 향해 불통이라고 한들 그 말에 일리가 없다고 할 수가 없다.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조선의 선조 임금이 그의 동태 파악을 위해 대규모 통신사를 파견한다. 정사는 서인의 황윤길, 부사는 동인의 김성일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온 그들의 보고는 완전히 달랐다. 황윤길은 히데요시에 의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하고 김성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서인인 황윤길이 ‘있다’ 하므로 동인인 김성일은 ‘없다’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김성일이 그때 좌의정이던 같은 동인인 류성룡의 추궁에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드러났다. 진실은 1592년의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리자(征明假道/정명가도)’는 구실에 의한 병화, 임진왜란이었다. 붕당(朋黨)이라는 ‘내 편’ ‘네 편’ 정치가 만들어낸 불통과 임금에 대한 기만이었다.

소통은 진실에 토대를 두고 진솔하게 이루어져야 성공한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사이에서와 같은 극단적인 부정직한 불통 사고는 지금의 개명천지에서는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정치 환경이 그처럼 편 갈림이 심할 때는 진솔한 소통의 토대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불통은 ‘내림’이 아니라고 믿는다. 따라서 정치 환경과 소통의 관계를 악순환으로 몰고 갈 것인가 선순환으로 돌려놓을 것인가 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대오각성에 달려 있다고 봐진다. 사실 이번 해프닝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서로 싸우고 비난할 만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볼 때는 예와 격이 있는 소통이 부족한 현실이 우스워 보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