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고려 충숙왕(忠肅王) 15년에 연복정(延福亭)에서 설계(說戒)해 백성들에게 돼지 기르는 것을 금하니, 고을 사람들이 하루에 기르는 돼지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고 한다. 부연일기(赴燕日記)의 기록을 보면 서융족이 돼지고기에 관해 이슬람교의 교리와 연관됨을 알 수 있고, 성호사설(星湖僿說)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 당시에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은 서천 사람 즉 서천축국 사람으로 옛날의 서천축국은 오늘날의 아라비아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제9권 인사문 지공(指空) 편을 보면 “지공이란 이는 서천 사람인데, 그 아버지의 이름은 만왕마갈제국(滿王摩竭提國)이요, 그 어머니는 향지국(香志國) 공주였다. 8세에 출가해 여러 나라를 유람하고 중국까지 갔으며, 일찍이 동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금강산에 예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도의 승려 지공은 서천축국 사람인데 우리나라(고려)에 와서 백성들에게 돼지 기르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을 통해 보면 서천축국은 오늘날의 아랍 즉 아라비아와 그 주변국임이 분명하다. 돼지고기를 금했다는 것은 이슬람교의 교리 이전에 아랍지역에 있었던 서천축국의 전통적인 금기였다고 볼 수 있다.

1828년(순조 28년)에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 정사 이구(李球)의 의관겸비장(醫官兼裨將)으로 청나라 북경에 갔던 의관 김노상(金老商)의 연행기록 부연일기에 “서융(西戎)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급격히 줄었던 육식 문화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부활했다. 하지만 그 중심은 소고기였고, 돼지고기가 아니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 17년(1417년) 윤 5월 80일조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에서는 돼지를 많이 기르지도 않았다. 1488년 조선을 방문했던 명나라의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는 “조선에서는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으며, 목축에는 염소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말을 부리는 사람은 있으나,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돼지는 소, 양과 함께 3대 희생(犧牲) 제물이었기에, 전국에서 길러졌다. 돼지고기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등 여러 제사에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사신 접대를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학자들의 문집의 기록을 보면, 돼지고기에 관련된 기록들이 참으로 많다. 조선시대에 돼지고기는 제사 등에 두루 쓰였으며 또 산림경제, 동의보감에서는 돼지고기가 약용(藥用)으로 두루 쓰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太宗) 17년(1417년) 윤 5월 8일 조선 사신단이 명나라에 도착했는데, 황제가 내시를 불러 “조선인들은 원래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소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조선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다는 것을 명나라 황제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년) 3월 4일(기미)의 기록에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이 호가(扈駕)한 대신들과 함께 의논해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도 그러하온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먼 도는 진상하는 것을 우선 정지시키되 가까운 도는 정지시킬 수 없사옵니다”고 한 기록을 통해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실록에서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은 조선의 서역(西域) 출신 관료로 볼 수 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이유는 실록에 돼지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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