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 양복점
정미소(1959~ )
방송국의 옛날 세트장을 걷는다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는 굴다리를 지나 노라양복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시간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서 계신다 옷 한 벌 지어달라고 하신다 미닫이문을 연다 재단사가 목에 늘어트린 줄자로 아버지의 가슴둘레를 잰다 아버지는 양복점 거울의 안쪽에 골몰하신다 동해왕대포집에서 아버지의 애창곡 ‘추풍령’이 흐른다 재단사가 가봉 날짜를 묻는다 아버지가 사라졌다 안감을 고르다가 아버지를 놓쳤다 장수약제상에서 보약 한 첩 지어드려야 하는데,

한낮의 방송국 세트장이 고요하다.

[시평]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지난 시절 빛바랜 사진첩 마냥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추억, 그 추억을 꺼내어 들여다보는 혼자만의 추억 여행. 그 안에는 그만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리움이 담긴 추억의 사진첩은 마치 드라마를 찍는 세트장과도 같이 아련하기만 하다. 오래된 시간이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추억의 세트장에는 그리운 아버지가 계시다. 늘 귓가를 떠돌던 아버지의 애창곡도 있고, 아버지 양복을 짓기 위하여 줄자로 가슴을 재는 재단사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양복이 다 완성도 되기 전 사라지신다. 노라 양복점에서 양복도 한 벌 맞춰드려야 하는데, 장수 약제상에서 보약도 한 첩 지어드려야 하는데. 아버지는 안 계시고, 한낮 고요한 세트장만이 내 가슴 한 곳에 덩그마니 남아 있다.

그래서 추억은 늘 애잔하다. 그리움의 시간이 고여 있는 깊고 깊은 골목 마냥, 또는 삐꺽이며 돌아가는 오래된 필름의 활동사진 마냥,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저만치에서 혼자 덩그마니 남아있는 우리의 아련한 추억.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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