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일본 정창원(나라현 도다이사에 위치한 왕실 유물 창고)에 보관돼 있는 81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촌락문서(新羅 村落文書)에는 지금의 청주(淸州) 주변 4개 촌락의 인구, 토지, 나무와 함께 가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4개 촌락에 말 61마리, 소 53마리와 그 증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돼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농민들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와 말에 비해 돼지 키우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285년에 불승 일연이 지은 5권 3책의 역사책 ‘삼국유사(三國遺事)’에 488년 신라 소지왕(재위; 479~500)이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때 제작된 신당서(新唐書) ‘신라’조에 ‘재상의 집에는 소, 말, 돼지가 많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도 귀족들의 육식 욕구를 충당시켜줄 돼지를 키웠음에 분명하다. 

백제의 경우는 중국의 역사서 수서(隋書) ‘백제’조에 ‘백제에 소, 돼지, 닭이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돼지와 관련된 상황을 더 알 수가 없다. 711년 신라의 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도살(屠殺)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의 도살은 가축을 함부로 죽여 육식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불교가 도입된 이후, 함부로 살생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육식 소비가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968년 고려 광종(재위; 949~975)은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궁에서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인 것으로 볼 때 불교의 영향으로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을 차츰 꺼리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고기를 다루는 것도 차츰 서투르게 되어, 육식 문화가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55년에 굴불군(屈弗郡, 현재의 안동 일대)에서 흰 돼지를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돼지는 상서로운 동물로 복(福)과 다산(多産)을 상징하며 덩치에 걸맞게 풍족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또한 돼지꿈을 꾸면 좋다고 여겼고, 돼지는 고구려의 수도 이전은 물론 고려 왕건(王建)의 조상인 작제건(作帝建,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이 집터를 잡을 때에도 미래를 예견하는 동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송나라 휘종(徽宗)이 1123년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1091~1153)이 고려에서 한 달여 동안 머무르다 돌아간 뒤 이듬해에 고려의 문물과 제도를 쓴 책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당시 고려의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使臣)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맞추어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腸胃)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이처럼 고기를 다루는 문화가 퇴보함에 따라 가축 가운데 돼지의 인기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말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소는 농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많이 길러졌지만, 농사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곡물을 먹고 밭을 망가뜨리는 돼지는 육식을 삼가는 고려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가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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