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 불리는 박청수 원불교 원로 교무는 한평생 55개국과 연을 맺으며 고통받는 이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0노벨평화상 최종후보 10인
어머니 뜻 따라 원불교 교무 돼
세계 55개국 지원 53개국 방문

한평생 아이 둘 허리에 찬 심정
고통 받는 이들 어머니로 살아
통일·평화·종교 간 화합에 헌신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지난 2010년 노벨평화상 후보 최종 10인에 올라 주목받은 박청수 원불교 원로 교무. 세상은 그를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 부른다. 한평생 무려 55개국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살아온 그의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그 답을 얻기 위해 박 교무가 기거하는 경기도 용인시 헌산중학교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을 찾았다.

◆나의 삶을 열어준 어머니

“청수야, 너는 커서 꼭 교무(원불교 교역자)가 되거라. 기왕이면 한평생 많은 사람을 위해 살고 큰살림을 할 일이다.” 스물일곱에 홀로 되신 청수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네였다. 남편 없는 시댁에서 아들 없이 딸 둘을 키우면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어린 청수는 종종 보았다. 그 어머니가 청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른 말은 “너른 세상에 나아가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였다.

어머니의 소원은 자연스레 청수의 소원이 됐다. 청수는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여 일 만에 세속의 삶과 결별하고, 원불교 정녀(일생 결혼하지 않은 여자 교역자)가 되고 교무가 되기 위해 아직 바람이 차가운 봄날 출가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라는 말씀처럼 한평생 세계 곳곳의 고통 받는 이의 어머니가 됐다. 그 뒤에는 “원불교 교무만 되면 끝까지 가르치리라”던 어머니의 약속과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다.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

박 교무가 머물고 있는 헌산중학교에는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박 교무의 삶의 내용을 정리한 박물관이다. 세계 55개국을 돕고 53개국을 방문한 자료가 세계 지도에 펼쳐져 있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기록물들이다. 제1전시실 원형으로 된 시청각실에는 박 교무의 세 살 적 아기 사진부터 그가 26년간 몸담았던 강남교당에서 퇴임할 때까지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북인도 히말라야 3600m 고지 설산 라다크에서 10년 동안 일했던 때 모습,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이자 소승불교 국가인 캄보디아의 지뢰를 제거하고 무료 구제병원을 세워 혜택을 보게 한 일 등 모든 일이 빼곡히 담겨있다. 한 사람의 삶을 담은 박물관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어떻게 이 많은 일을 저렇게 소녀 같기만 한 분이 해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 종단을 아우른 교제와 봉사를 해 온 박청수 원로 교무가 故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과 인사하고 있다.ⓒ천지일보(뉴스천지)
◆종교의 벽 허물고 나환자 돕기 31년

박 교무는 강남교당을 창립한 이후 원불교 일은 본업이고, 천주교 여러 기관을 살피는 일은 부업인 것처럼 열심이었다고 회고했다. 종교의 이념은 사랑과 평화라고 하지만 박 교무처럼 타 교단에서 운영하는 기관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종교지도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추석 명절이면 언제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성 라자로 마을 식구들부터 챙겼다. 나환자를 돌보는 수녀님들이 고마워 시원한 여름 이불도 해줬다. 그는 또 나환자를 돕기 위해 스스로 담양 창평엿을 가져다 엿장수를 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엿을 팔아 성 라자로 마을을 도왔다.

그밖에도 국제연등불교, 프랑스 길상사, 성북동 길상사 지장전,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 기독교 사랑의 쌀 모으기 등 타 종단을 위해 31년 동안 강남교당에서 쓰인 돈은 2억 870여만원에 이른다. 그는 한 병의 잉크로 바닷물의 색깔을 바꾸진 못해도 그 잉크 빛은 바닷물 속에 있다고 했다. 타종교의 소외계층을 돕는 그 같은 노력이 종교 간 갈등과 불화의 골을 메우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캄보디아 지뢰제거에 헌신하다

박 교무는 고통 받는 이들에게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평화’라고 했다. 그는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의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어머니가 자식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일을 해결하러 나섰다. 지난 26년간 캄보디아의 지뢰제거 사업에 동참한 것도 같은 연유다. 물론 반대도 따랐다. 그러나 어떤 이유도 고통 받는 이들을 도우려는 그의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박 교무와 캄보디아와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시기 MRA(Moral Re-Armament, 도덕재무장) 세계대회도 열리고 있었다. 당시 연사로 나온 캄보디아의 젊은 참가자 웽 모리가 크메르루주에 의해 자국 지식인과 승려 등 무고한 양민 200만 명이 학살당했고, 국민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대부분의 청중은 무심했다.

그러나 박 교무는 먼 타국까지와 별 성과 없이 돌아갈 젊은이가 걱정됐다. 박 교무는 원불교 강남교당에 연락해 100만원만 급히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스위스 MRA본부에 500달러씩 송금했다. 그 청년은 이후 캄보디아 공보처장관이 돼 지뢰 제거 책임자가 됐다.

그러다 1994년 MRA영국 지도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캄보디아 지뢰제거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내 몇 개라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995년 3월 박 교무는 캄보디아 지뢰제거 작업을 위해 10만 달러를 마련해 영국 할로 재단에 보낼 양으로, 마치 응급환자를 구하는 심정으로 일을 시작했다. 박 교무는 캄보디아 지뢰제거를 위해 영국 할로재단에 11만 달러를 전달했다. 박 교무는 지뢰를 제거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이듬해 5월 영국 할로 재단으로부터 그 경비로 지뢰를 제거해 약 1만 평의 땅이 회복됐고, 다리나 팔을 앗아가고 시력을 잃게 하는 지뢰 58개와 시설물 폭파지뢰 31개를 제거했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이외에도 캄보디아인을 위해 의류 여섯 컨테이너를 보내고, 바탐방 시엠레아프 지역 74개 마을에 공동우물과 식수펌프를 마련하고 건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다목적 댐 2개를 건설했다. 2003년엔 무료 구제병원을 운영, 2015년 2월 현재 무료 진료 혜택을 입은 환자가 18만 9천여 명에 달한다. 2008년엔 오인환 교육센터를 개설해 한국어 태권도 음악 미술 농구 등 다양한 교육을 하고 있다.

한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빈민가 언동마을에서는 생후 7개월에서 3세까지의 어린이 70명을 하루 11시간 동안 돌보며, 3끼의 식사와 3번의 목욕을 시키며 영양가 있게 위생적으로 아기들을 돌본다. 일터에 나갔던 부모들은 하루를 잘 지낸 아기들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박 교무가 필요한 일들마다 마치 지켜 서 있듯이 26년간 캄보디아에서 활동한 것은 킬링필드를 드림필드로 바꾸는 일이었다.

◆남북통일 위해 작은 빗방울이라도

한두 방울의 빗물은 아무 힘이 없지만 꾸준히 비가 내리면 견고하던 축대도 무너진다.
북한이 대홍수의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분단 후 처음으로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을 도울 길이 열렸었다. 박 교무는 1995년 9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 돕기 성금 1천만원을 기탁하고, 1998년 평양을 방문한 후부터는 북한동포 돕기 생활화 운동을 전개했다.

간장이 귀하다는 북한에 간장 2만 7000리터를 콜라병에 담아 두 컨테이너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비료, 옥수수, 감자 및 어린이를 위한 분유도 두 컨테이너를 보냈다. 또 여성 생리대가 없어 걱정이 된다는 북한 여성들을 위해 20만 개의 생리대를 천을 짜서 만들어 보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세창상사의 도움으로 새 스판, 벨벳 한 컨테이너 반을 희사 받아 5천 명의 여성이 치마, 저고리를 해 입을 수 있는 새 옷감도 보냈다. 북한에 아홉 컨테이너의 물량을 보냈고 강남교당에서 10년 동안 지원한 금액은 7억여원에 이른다.

박 교무는 1994년 정부로부터 북한이탈 청소년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을 제안 받았다. 그것은 앞서 세운 성지송학중학교와 헌산중학교가 대안학교로 특성화 교육을 하고 있고, 또 경기도 안성 하나원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학교를 설립하려는 정부 방침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기도 안성에 1만 5천 평의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규정에 맞는 학교를 세운 후, 정부로부터 160억원 규모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한겨레 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북한을 이탈한 청소년들이 남한에 적응하고 그들이 밝은 미래를 열어가도록 뒷바라지 하고 있다. 그들이 장차 통일의 선봉자가 되고, 지름길을 마련해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 일이 남북통일을 위한 박 교무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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