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서기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는 “옛날 북방에 탁리국(槖離國)에서 왕의 시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고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돼 있다.

탁리국(橐離國)의 돼지가 살려준 아이가 곧 부여(夫餘)를 건국한 동명(東明)이다.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부여국의 돼지가 등장한다. 부여는 돼지와 깊은 인연을 가진 나라였다. 부여는 말, 소, 개, 돼지 등의 이름을 따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저가(豬加)의 관명(官名)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돼지 이름을 딴 저가(豬加)가 있었다. 부여는 소, 양, 개, 말과 함께 돼지를 키웠고, 가축을 잘 기르는 나라로 알려졌다.

부여 관련 기록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여 지역이 돼지를 키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본래 숲지대나 그늘진 강둑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나무열매, 과일, 식물뿌리 등을 먹으며 살 수가 있었다. 부여가 위치한 만주 지역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목재를 생산하는 드넓은 나무바다(樹海)가 펼쳐진 곳이다. 부여는 숲이 많았기에 돼지를 잘 키울 수 있었다.

644년에 편찬된 진(晉, 265~419)나라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 기록에는 “이 나라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고 했다. 이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 기록에 “그 나라에는 가축으로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 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는 내용과 거의 같다.

3세기 부여 동쪽에 위치해 있던 숙신(肅愼,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 서기 280년 이후 고구려에게 굴복하며, 말갈족의 선조로 알려짐)에서도 돼지를 잘 키웠고, 6∼7세기 숙신 지역에서 성장한 말갈에서도 돼지를 잘 키운 셈이다. 8세기 이후 말갈을 다스린 발해(渤海)의 경우에도 돼지를 키웠는데, 막힐부의 돼지가 특히 유명했다.
부여, 숙신, 말갈,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물론 돼지를 키웠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인 교시(郊豕)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년)에 완성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유리왕 19년(기원전 1년)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長屋澤) 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다리 근육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祭天)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한 것이냐’고 하며 두 사람을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희생물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었으며, 희생용 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이를 뒤쫓던 관리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이 지역이 수도로 삼기 좋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기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게 된 것이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208년 교시가 달아나자 관리들이 쫓아가다가 주통촌(酒桶村)이란 곳에서 후녀(后女)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게 됐다. 관리들이 후녀에 대해 임금께 이야기했고, 마침내 임금이 후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 성밖의 돼지)’라 했는데, 그가 곧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수도를 새로 정해주고, 동천왕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으니 고구려에서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길만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기음식인 맥적(貊炙)은 멧돼지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안악 3호 고분의 벽화에는 부엌 옆에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둔 육고(肉庫) 그림이 있는데, 꼬챙이에 걸린 사슴과 돼지고기를 볼 수 있다.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안시성 안에서 닭과 돼지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부여나 말갈에는 못 미친다 할지라도 상당한 숫자의 돼지를 사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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