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수양제 양광(楊廣)은 문제 양견(楊堅)과 독고황후 사이의 2남으로 출생했다. 고구려와 3차례 전쟁을 일으켜 우리와는 깊은 악연을 맺었다. 600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4년 후에 계위했다. 재위기간에 기존의 수로와 운하를 연결해 건설한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의 위력을 과시한 거대한 토목사업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역사는 그를 자태는 아름다웠지만 총명과 지혜는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가장 큰 공은 남조 진(陳)을 멸하고 남북을 통일한 것이다. 588년 겨울 28세에 총사령관이 되어 통일전쟁을 지휘했지만, 실질적인 작전은 하약필(賀若弼), 한금호(韓擒虎) 등 명장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그의 명성을 높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군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제위에 오르자 고구려, 토욕혼, 돌궐과 전쟁을 일으킨 것은 전공을 세워 형으로부터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오명을 씻으려는 정치적 목적과 문제의 경제정책 성공으로 지나친 부가 중앙으로 집중된 것을 분산시키려는 경제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운하 건설,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 자신의 거점이었던 양주를 제3의 수도인 강도(江都)로 만들었던 것도 결국 정치적, 경제적 상황타개를 위한 일종의 ‘뉴딜정책’이었다는 것이 황인우(黃仁宇)의 생각이다. 청말까지 이어진 과거제도의 개창도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이 조치로 주류였던 관농(關籠)출신 문벌세족이 밀리고, 우세기(虞世基), 배온(裵蘊) 등 과거출신 관료가 정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통전(通典)에 따르면 과거는 문학적 재능이나 지식보다는 인간의 품질을 중시했다. 그러나 거듭된 전쟁과 대토목공사로 백성들의 불만이 표출되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은 관농출신이 많았다. 당을 창건한 이연과 이세민, 한때 중원을 장악하고 수의 주력부대와 자웅을 겨루던 이밀(李密)이 대표적이다. 결국 양제는 보수세력에게 무너진 것이다. 황음무도한 폭군이었다는 평가는 당왕조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는 경제가 너무 발달해 망한 것이다.

문제의 치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장서사업이다. 역사는 역대의 서적이 진시황을 만나 횡액을 맞았지만 수양제를 만나서는 너무 넘칠 정도로 호사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동도 낙양의 관문전(觀文殿)에는 37만권, 7만 7000종이 소장됐다. 이후 전쟁으로 대부분의 도서가 소실되고 당현종시대에는 7만권만 남았다. 그것도 당대의 학자가 지은 것이 절반이었다. 양광이 정리한 도서가 모두 남았다면 그는 세계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이었을 것이다. 폭군이라고 하지만 그의 시대에 중국의 잔혹한 형벌이 많이 사라졌다. 10가지 죄가 삭제되고 500조항이 18종류로 줄었다. 그가 개편한 ‘대업율’은 이후 어느 왕조에서도 근본적인 수정을 하지 않았다. 양제는 문학애호가이기도 했다. ‘서늘한 가을바람 불어오니(肅肅秋風起), 유유히 만리길을 간다(悠悠行萬里)’는 서역을 순시할 때 지은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의 일부로 천하의 명품이다. 후대의 시인은 그가 조조의 풍모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양광이 위대한 정치가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시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겨울 까마귀 몇 개의 점처럼 날고(寒鴉飛數点), 흐르는 물은 외로운 마을을 감고 도네(流水繞孤村)’라는 구절을 본 명말청초의 대학자 왕부지는 영기(英氣)를 느낄 정도라고 평가했다. 성당시대의 웅장한 미학과 호기는 그에서 비롯되었다. 망국의 군주였지만, 그는 좋은 시를 여러 편 남겼다.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는 당대의 장약허(張若虛)의 시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양광이 먼저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다. 장약허가 양광을 모사한 느낌이 강하다.

호극(胡戟)은 ‘문벌정치가 과거출신 관료정치로 전환한 계기는 우문태(宇文泰), 우문옹(宇文邕), 양견, 양광, 이세민, 측천무후 등 6명의 공이다. 그 가운데 가장 원대한 길을 간 수양제와 무측천이 가장 많은 욕을 먹었다’라고 평가했다. 몽만(蒙曼)은 ‘수양제는 폭군이지만 혼군은 아니었다. 덕은 없었지만, 공은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공업은 백성의 행복감과 함께한 것이 아니다. 당대의 공은 아니지만 천추에 유리한 공을 세웠고, 당대에 죄를 범했지만 천후에 이익이 되었으니 이것이 수양제의 가장 큰 문제였다’라고 평가했다. 심모원려는 지도자와 국민이 공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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