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11월 25일 개시한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서부전선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유엔군은 불과 10일 동안 38선까지 120마일이나 쭉 밀렸다. 이때 마오(毛)는 ‘미군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보다 못하다’고 비아냥댔다. 패주하는 미군 병사들 가운데 꽤 많은 수는 그 혹한에 여름 군복을 입은 채였다. 한심한 일이지만 그만큼 유엔군이 준비 없이 치고 올라가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한편 동부전선은 그 같은 서부전선의 양상과는 사뭇 달랐다. 11월 27일 장진호 본 전투가 시작된 후 12월 24일 미군의 마지막 철수선이 흥남 부두(staging area)를 떠날 때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그 사이, 쫓기는 유엔군보다도 그들을 쫓는 중공군이 도리어 더 호되게 혼이 났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입은 피해는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컸다. 그렇게 중공군에게 쓴맛을 안긴 주인공은 더 말할 것 없이 미 해병 1사단이며 그 사령관 O. P 스미스(Smith) 소장이다.

중공군은 낮에는 산골짜기에 산재한 민가나 산악의 동굴에 몸을 숨겼다가 주로 야간에 공격을 해온다. 정적을 깨는 한밤의 피리소리가 그 신호다. 피리 소리가 멎으면 나팔을 불고 꽹과리 북 징 등을 요란하게 두들기며 쓰나미 같은 인파(human wave)로 덮쳐온다. 이른바 인해전술이다. 그들의 공격은 그들 뜻대로 성공한 것이 아니면 보통은 날이 훤히 샐 때 멎는다. 이렇게 그들의 공격이 실패했을 때 그들이 물러난 곳에는 수십, 수백, 많으면 수천을 헤아리는 그들 시신으로 겹겹이 뒤덮이기 마련다. 병력자원은 무한하나 장비가 빈약한 중공군의 인파전(人波戰)과 미군의 화력전과의 대결에서, 미군이 성공적이었을 경우 미군이 중공군에 강요하고 중공군이 그에 응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는 대개 이러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그 같은 그들보다 월등한 중무장과 화력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중공군이 미군과 전투를 벌일 때 정면 공격보다는 측면(flank)을 주로 치는 것이나 중장비의 기동이 제한되는 약점을 노려 산악에서 야간에 매복 기습을 선호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철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격’이라 했지만 장진호 철수 작전의 양상도 그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11월 27일 전투를 시작해 3일을 버티다가 30일 철수에 들어간 미 해병 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스미스 소장이 합류를 고대하는 14마일 남쪽 하갈우리의 사단본부에 12월 3일에야 파김치가 되어 도착할 수 있었다. 대담해진 중공군의 끊임없는 주야간 매복 기습을 물리치고 도로에 설치한 숱한 장애물(roadblock)들을 치우며 오느라 수백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치거나 동상을 입었다. 그들은 꾸벅 꾸벅 졸면서 사단본부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중공군의 야간 공격에 주로 많이 시달렸다. 머리 위에 항모에서 발진한 해군 코세어(Corsair) 전투기들과 해병대의 스카이레이더(Skyraider)기들이 기총소사를 퍼붓고 폭탄 로켓 네이팜(napalm)탄 등을 우박처럼 쏟아 붓는 낮 동안에는 중공군은 미군이나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밤일지라도 그루만(Grumman)의 F-7F 타이거 캣(Tigercat) 탐색기가 목표물을 찾아 상공에서 매눈을 뜨고 날고 해병의 81미리 박격포, M-26탱크의 90미리 포와 기관총, 자동소총 BAR, 중기관총 등 당시로서는 중공군은 꿈도 못 꿀 중무기들의 엄청난 화력에 의해 중공군의 인파 쓰나미는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만약 미군이 트루먼과 맥아더의 불화와 지휘부의 혼선과 오판을 바로잡고 장진호 전투에서처럼만 단호하게 전쟁에 임했다면 이때의 수세는 얼마든지 공세로 뒤바뀌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흥남 해역에는 한반도 전 해역에서 제해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미 항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 등의 엄청난 해상 전력이 집중돼 있었으며 유엔군 철수를 대비한 수송선 193척도 대기 중이었다. 여기서 발진하는 함재기와 내륙과 해안에 퍼부어대는 함포 공격으로 미해병 1사단과 유엔군을 쫓는 중공군 북한군의 발걸음은 갈수록 더 절름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뜸을 타 하갈우리에 집결한 미 해병은 12월 6일 그곳을 출발해 죽음의 고개인 황초령과 수동, 고토리를 빠져나와 1주일 만인 12월 11일 드디어 흥남과 함흥의 중간 안전지대에 도달함으로써 작전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자정 그들은 그들을 태우러 온 수송선 LST가 기다리는 대망의 흥남항 부두에 진입했다.

처음 그들은 1만 2000명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전투로 죽고 다치고 동상을 입은 사람을 뺀 나머지 성한 생존 대원은 처음 인원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을 쫓은 중공군의 피해는 더욱 막심했다. 그들은 5개 사단이 완전히 파괴돼 미 해병 1사단을 괴멸시키려던 의도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부전선의 유엔군 구축(驅逐)에 나선 중공군 9병단의 전투기능도 철저히 상실돼 한동안 전선에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쫓기는 철수 작전이기는 했으나 조지 워싱턴으로부터 시작한 140년 미 해병 역사에 비추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그것은 미군의 탁월한 해·공·육 연합 작전 능력과 미 해병 1사단 장병들의 용기 그리고 스미스 소장의 현명한 지휘력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만약 이들이 진격만을 외쳐대던 도쿄 사령부나 알몬드 10군단장의 지시대로만 움직여 중공군의 덫에 깊숙이 걸려들었다면 그들은 장진호의 혹한과 중공군의 덫을 쉽게 빠져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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